말 목장길 따라 느릿느릿 걷다가, 오름 풍경에 취하다
‘혼자서 걷는 길이 생각에 몰입할 수 있어 좋다.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삶의 고개를 헤아린다.’ 법정 스님의 이 말대로 고적하고 호젓한 가시리의 쫄븐갑마장길은 혼자 걸어야 제격이다. 굼부리 세 개가 어울린 따라비오름의 한 능선. 제주=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혼자서 걷는 길이 생각에 몰입할 수 있어 좋다.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삶의 고개를 헤아린다.
인간이 사유(思惟)를 하게 된 것은, 모르긴 하지만 보행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곳에 멈추어 생각하면 맴돌거나 망상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걸으면서 궁리를 하면 막힘이 없이 술술 풀려 깊이와 무게를 더할 수 있다. 칸트나 베토벤의 경우를 들출 것도 없이, 위대한 철인이나 예술가들이 즐겨 산책의 길에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걷는 데서 창의력을 일깨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가시식당의 별미요리인 돼지고기 두루치기.
활어횟집 도두대경의 해물코스 중 참돔회.
되돌아본 세월엔 아쉬움만 담기기 마련. 그런데 내겐 그런 회한이 없다. 오히려 입가에 빙긋 미소까지 담길 만큼 여유롭다. 짧긴 해도 스님과 나누었던 소중한 시간, 게서 얻은 가르침 덕분이리라. 스님 모습을 똑같이 닮은 이 글과 해후까지 하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삶을 다시 배우고 흉내 낼 기회를 얻은 덕은 아닐지….
이 책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한 달 전 서울 종로1가 빌딩 지하의 헌책방(아름다운가게)에서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거긴 매일 새 책으로 덮인다. 모두 뭇사람 손에서 버려지거나 기증된 헌책이건만 그게 내겐 늘 ‘새 책’이다. 이 책 ‘서 있는 사람들’도 그 무더기에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냉큼 집어 들고는 서둘러 책장을 넘겼다. 그때 처음 편 쪽이 이 ‘직립보행’. 산중 암자의 스님이 모처럼 찾은 도시에서 겪은 수선스러움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를 적고 있는데 가시리로 떠나는 치유 여행은 그걸 읽는 중에 자연스레 계획됐다.
오로지 걷기 위해서라면 세상 도처 모든 길이 목적지일 터. 그러나 스님처럼 ‘홀로 걸으며 생각에 몰입하려면’ 마땅한 곳을 찾아야 한다. 오가는 사람이 없고 자연은 수려하며 주변은 호젓해야 할 듯…. 그 점에서 가시리가 제격으로 다가왔다. 제주 섬에서도 관광객 발길이 뜸한 동부, 게서도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초원의 방목장뿐이라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중산간 지대라서다.
그러니 가시리를 걷는다고 함은 곧 갑마장 목장 길을 걸음이다. 생각해보라.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노니는 말이 이루는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있음을. 길은 목장을 따르고 노란 유채꽃이 바다를 이룬 평원도 지난다. 오름도 몇 개 오르내린다. 그 오름 등성 아래로 펼쳐지는 중산간의 풍치. 제주 섬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풍광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다.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 외 인공의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어서다.
그런 가시리에선 등산복보다 평상복이 좋을 듯싶다. 목장길에 부드러운 능선의 낮은 오름이 대부분이라서다. 바닥도 부드러우니 두툼한 밑창의 신발이면 좋을 터이다. 그래야 ‘직립보행’의 법정 스님처럼 ‘맑은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스척스척 활개를 치면서’ 유쾌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초원의 말 구경에 족한 관광객이라도 따라비오름만은 꼭 오르라고 권한다. 나무계단으로 20분만 오르면 된다. 거기선 조랑말체험공원과 풍력발전단지, 말 목장을 아우르는 멋진 경관도로인 녹산로가 멀리 한라산 자락을 배경으로 훤히 조망된다.
표선 해비치 해변에 자리잡은 해비치 호텔&리조트의 야외풀. 섭씨 30도의 온수다.
두 번째 이유는 따뜻한(섭씨 30도) 야외 풀이다. 수영과 온천은 기분을 좋게 한다. 그 요체는 따스함과 체중을 10분의 1로 줄이는 부력, 피부와 물의 부드러운 마찰. 이 봄 따사로운 볕 아래 온수 풀에 몸을 담근 채 싱그러운 바람과 해맑은 공기를 즐기는 해비치에서 하루. 지금까지 어떤 제주 여행보다도 안락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최우선으로 나는 호텔 종업원의 미소를 꼽는다. 햇빛 충만한 아트리움 덕일까. 직원들 얼굴엔 늘 미소가 담겨 있다. 생각해 보니 체류하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편안함은 그 미소에서 온 듯했다. 힐링이 무언가. 내 마음을 평화로 이끄는 현상이다. 미소 띤 그 얼굴이 나를 그리로 이끌었다고? 그러면 그것으로 힐링은 이미 이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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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