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정치부 차장
그의 책이나 인터뷰 어디에서도 성인이 된 이후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록을 찾기 힘들다. 199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고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삶에 만족한다고 밝힌 정도다. 다만 친조카와 시간을 보낼 때 많이 행복해한다는 얘기는 들린다. 아마 ‘독신 가장’으로서 집안의 대를 잇게 된 데 대한 고마움과 안도감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소망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 숱한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논쟁이 이어져 왔지만 명쾌한 정답은 없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오천만 국민행복 플랜’을 들고 나왔을 때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책임진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다.
혹자는 행복은 ‘가난한 마음’에서 나온다고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행복은 소득 증가보다는 사람과의 관계 등 다른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지만, 저소득층은 주로 소득이 많아지는 것에 비례해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전문가 분석도 있다. 다만 박 대통령의 ‘행복론’을 보며 뭔가 공허함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박 대통령이 소득, 일자리, 안전, 노후 대책 등 민생을 중시하면서 국민행복을 ‘시혜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행복은 누가 안겨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주관적 요인이 복잡 미묘하게 얽힌 과정이고, 그에 따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대통령 한 명 바뀌었다고 ‘행복 시대’가 활짝 열릴 것으로 기대하는 우민(愚民)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바에야 양질의 일자리를 수십만 개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긴 그 행복의 시대를 추진하겠다는 정부조직 구성조차 안 되고 있으니 말해서 뭣하랴.
국연(國緣)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도자를 둔 같은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 그 또한 운명이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5년 뒤 우리는 ‘행복의 나라’라는 항구에 닻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청와대에 입성하던 날, 오랜만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박 대통령은 모처럼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그 환한 미소를 보며 나이 든 분들 중엔 “짠했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들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삶이 행복해지기보다는 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삶이 행복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