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으로 집안 풍비박산… 방랑길 현장에서 답을 찾다
김홍도의 풍속화 ‘점심’. 일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둘러앉아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있다. 성호 이익이 살던 시대에는 빈부격차가 심화돼 양반마저 굶주리는 등 민생이 불안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젊은 성호의 희망을 꺾은 당쟁은 왜 생겼을까. 누구는 갈라져 싸우기 좋아하는 우리의 민족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지배자들은 이상적인 도덕정치를 이루기 위해 군자와 소인이 따로 나뉘어 붕당(朋黨)을 결성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심지어 율곡 이이는 “붕당이 성할수록 임금은 성인이 되며 백성은 더욱 편안해진다”고 했다.
성호 설명은 이랬다. 밥그릇은 하나뿐인데 굶주린 사람이 열이라면 싸움이 일어난다. 과거급제자는 늘어나지만 관직은 제한돼 있다. 벼슬을 놓고 무리지어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단이 이러했으니 대책도 달랐다. 우선 과거제와 관료제를 개혁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양반에게 다른 호구책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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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의 현실을 직시한 개혁론을 담은 ‘성호사설’. 성호기념관 제공
영조 때 한 암행어사가 지방을 돌아본 뒤 임금에게 보고했던 일화는 당시의 민생경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암행어사가 충청도의 한 양반집 앞을 지나가는데 마당에서 바깥양반이 새끼줄을 손에 들고 엉엉 울고 있고, 그 옆에는 개 한 마리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노부부가 양반인데도 도무지 먹을 게 없어 개를 잡아먹기로 했다. 부인이 부엌에서 개의 목에 새끼줄을 걸고 잡고 있을 테니 남편더러 밖에서 줄을 당기라고 했다. 남편이 줄을 당긴 뒤 부엌에 들어가자 개는 살아있었다. 극심한 가난을 견디지 못한 부인이 대신 목을 매 죽었던 것이다.
숙종 후반기에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는 발전했으나 벌열(閥閱·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과 결탁한 독점상인들이 늘어난 부를 독점한 것이 문제였다. 소수의 부농이 대규모 농사를 지음으로써 대다수 농민은 작은 경작지마저 얻기 힘들었다. 분배의 불균등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정치권력 또한 노론외척에게 집중됨으로써 그때까지 유지되어 오던 붕당 간의 균형이 파국을 맞았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국민의 좌절감을 반영한 명분의리론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현실에서 민초의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실용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다. 민생을 위해 국가 경영의 틀을 새로 짜는 경세학이 지극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성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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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성호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