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명 사망 인질참극 왜?군부 1992년 쿠데타로 집권… 무장세력과 끝없는 유혈충돌 희생자 10만~15만명 발생
알제리 민영 방송 엔나하르 채널은 20일 보안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가스전 내부에서 인질의 시신 25구가 발견됐다”고 전했다. 알제리 공보장관도 이에 앞서 “실종된 인질의 행방을 찾고 있다. 사망자 수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최종 작전 결과 21명의 인질이 사망했으며 16일 근로자가 탄 버스가 공격받았을 때 사망한 경호원 2명까지 합치면 23명”이라던 내무부의 19일 중간발표보다 희생자가 4명이나 늘어난 것. 알제리 내무부는 중간발표에서 “알제리 노동자 685명, 외국인 노동자 107명을 구출했다”고 밝혔다. 테러범은 32명 전원이 사살됐다. 가스전의 한 목격자는 “일본인 9명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AFP통신에 말했다. 프랑스2방송은 “현장에서 불에 탄 시신 15구가 발견됐는데 13명은 인질이고 2명은 테러범”이라고 보도했다.
참혹한 결과로 끝난 알제리 이슬람 테러단체의 인질극은 알제리 내전이 시작된 20년 전부터 이어져온 정부와 무장세력 간의 끝없는 피의 대결이 빚어낸 비극의 산물이다.
알제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인질 당사국에 통보도 하지 않고 무력 진압작전을 벌일 만큼 테러세력에는 강경하게 대응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알제리 군부의 이슬람 테러정책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테러 대처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대응하는 것은 알제리 정부의 전통”이라고 보도했다.
그런 사례는 많다. 1995년 2월 세르카지 교도소에서 이슬람 급진주의 수감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을 때 알제리 군부는 진압 과정에서 200여 명을 사살했다. 1996년 3월 티베린 수도원에서 프랑스인 수사(修士) 7명이 무장이슬람그룹(GIA)에 납치됐을 때도 협상을 거부하고 공격에 나서 인질이 모두 희생됐다. 티베린 수도원 사건은 ‘신과 인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2010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알제리 정부가 강경 대응하는 이면에는 1992년 군부 쿠데타로 출범한 정부와 이슬람 무장단체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자리하고 있다.
군부의 맥을 이어온 정권은 1993년 창설된 GIA 등이 주도한 테러에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1999년 취임한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현 대통령은 2000년 1월 협상을 통해 FIS를 해체한 뒤 테러 잔당 토벌을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군 특수부대 지휘관 대부분은 체첸 게릴라와 인질범들을 무자비하게 다뤄온 러시아에서 대테러 훈련을 받았다.
이후 GIA 출신 이슬람 강경파 살라피스트들은 산악지대에서 알카에다북아프리카지부(AQIM)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무장투쟁을 해왔다. 동부 카빌리 산악지대는 알제리 지하드운동의 성지가 됐다. 카빌리 산악지대는 AQIM의 지도자인 알제리 출신 압델말레크 드루크델이 은신해 있는 곳. 알제리 정부는 여러 번 군사작전을 펼쳤지만 테러세력을 완전히 토벌하지 못하고 있다. 알제리 내전이 시작되고 20여 년 동안 정부군과 무장세력 간의 유혈충돌로 10만∼15만 명이 희생됐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