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의회 한국통이 본 ‘박근혜 당선’
데니스 핼핀 미 하원 외교위원회 동아시아 담당 전문위원·전 평화봉사단 자원봉사자
한국의 오늘은 1971년 2월 내가 평화봉사단 자원봉사자로 갔을 때와는 천지차이다. 당시엔 남성우월주의가 사회를 지배했다. 남편이 부인에게 ‘바가지 긁지 마라’거나 ‘남자가 우선, 여자는 그 다음’ 이라는 말이 가득했다.
“아들 낳아서 축하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딸 낳아서 축하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서울의 한 대학교수는 동료 남자교수로부터 ‘딸부자’라는 조롱을 받았다. 이 교수는 아들을 얻기 위해 무려 딸을 12명이나 낳아야 했다. 마치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나오는 유대인 아버지 테비가 많은 딸을 부양하기 위해 걱정하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여성에 대한 성 차별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1980년대 초까지 일한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관에선 미국인 여직원도 결혼하면 가톨릭 수녀가 그렇게 하듯이 사표를 내야 했다.
1980년대 초반 서울에서 열린 영사 회의에서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근무하던 ‘캐슬린 스티븐스’라는 직원이 내가 일하던 대사관 정치과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캐슬린은 국무부 당국자로부터 “한국인 동료들이 여자에게는 말도 걸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대사관 정치과에서 일한 여성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어 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기꺼이 응했다. 캐슬린은 나중에 대사관 정치과에서 근무했을 뿐 아니라 최초의 여성 주한 미국대사가 돼 ‘유리천장’을 깼다. 캐슬린은 딱딱하고 냉정한 이미지의 전형적인 외교관 모습에서 벗어나 따뜻한 마음과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인을 매료시켰다.
박근혜 당선인은 청와대로 향하는 유리천장을 모두 깼다. 그는 마거릿 대처와 아웅산 수치처럼 전 세계 젊은 여성의 역할 모델이 될 것이다. 한국인은 국가 리더로 여성을 뽑은 많지 않은 국가 중 하나가 됐다. 이것이 12월 19일 대선을 역사적인 선거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