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혜진이 영화 ‘26년’을 찍고 난 후 “어린 학생들이 ‘부모님 모시고 한번 더 보러 왔다’는 글을 보면 정말 뿌듯해요”라고 말했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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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한혜진(31)이 독수리처럼 비상(飛上)하고 있다.
그동안 스스로 자신을 제한했던 한혜진은 낭떠러지에서 날개를 펼치려고 하는 아기 독수리였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마음을 열었다. 두려운 도전을 서슴지 않기로 했다.
그런 도전 중 하나가 이번에 촬영한 영화 ‘26년’이다. 용기있는 도전은 한혜진에게 배우로서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안겨줬다. 나는 법을 깨우친 독수리가 창공을 날 듯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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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영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녀의 눈가가 자주 촉촉해졌다.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서 보여준 해맑은 표정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 “유가족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 제작두레 시사회는 잘 마쳤나.
“잘 다녀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광주 트라우마센터였다. 5.18 피해자분들의 치유를 돕는 곳인데 영화를 마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분명 아프게 보셨을 텐데…. 그냥 ‘잘 표현해 보려고 했다’라는 말밖에 못했다. 그 아픔 때문에 차마 얼굴도 보기가 힘들었다. 함께 영화를 봤던 유가족들 중 한 분이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는데 느낌이 참 오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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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영화를 보다 ‘쏴, 쏴!’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다더라. 차마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도 있고…. 어떤 분은 영화 속 곽진배처럼 실제로 청와대에 갔다가 난지도에 버려졌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들처럼 우리 영화가 큰 사건 속에 있었던 각각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들었다.”
- 사실, ‘26년’ 전에도 5.18에 관한 영화는 많이 나왔다.
“맞다. 나 역시 ‘꽃잎’이나 ‘박하사탕’ 등 관련된 영화를 많이 봤다. 우리는 유가족들의 아픔과 그들의 생각에 포커스를 맞췄다.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은 계속 되고 있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공감해주는 것 같다”
- 그렇다면, 한혜진이 이 영화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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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부끄러웠나.
“‘나는 정말 나밖에 모르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의미 있고 좋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기적인 나를 발견했다. 연기자로서 반열에 오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염원했던 수많은 두레 회원들을 보면서도 부끄러웠다. 아마도 나는 이걸 알려고 이 작품을 하게 된 것 같다.”
배우 한혜진.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 “눈앞에 총이 있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 촬영을 하며 울컥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곽진배와 부모님 영정사진을 보러 갔을 때였다. 그 곳엔 등장인물 가족들은 빼놓고 모두 실제 민주화운동을 하다 돌아가셨던 분들인데 기분이 울컥하면서도 묘했다. 또 미진이가 크레인을 타고 ‘그 사람’을 쏘려고 할 때, 뒤에 진배가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렀다. 쏘면 진배도 죽으니까. 눈이 퉁퉁 부어서 촬영을 했다."
- 실제로 M16을 사용했다고.
“폐건물 안에서 시험으로 화약총을 쏘는 걸 봤는데, 건물이 터지는 줄 알았다. 정말 무서운 울림이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눈앞에 나를 쏘려는 총을 보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감독님께서 총을 쏠 때 눈을 깜빡거리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한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나는 고공에서 60발 정도를 쏜 것 같은데 답답했던 맘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좀 더 주시면 안돼요?’라고 했다.(웃음)”
- 이 영화가 한혜진이라는 ‘배우’에게 남긴 것이 있나.
“‘공감’인 것 같다. 역사를 다룬 작품이기에 관객들이 크게 공감해주신다. 뜨거운 열기,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유…. 영화가 나오기까진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해줄 것인가에 대해 상상을 할 수가 없었는데 오고가는 뜨거움을 실제로 보니 매우 좋았다. 우리가 했던 것을 정말 공감해주시니까 배우로서 그 만큼 짜릿한 순간도 없을 것 같다.”
- 영화의 반응이 좋은 것 같다.
“주로 SNS를 통해 소식을 듣는다. 티켓을 찍어 보내주는 분들도 있고, 이번 영화를 통해 배우 한혜진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어떤 분은 ‘이런 영화에 참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시기도 하셨다. 내 직업이 배우고 내가 했을 도리를 다 했을 뿐인데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더 감사해지더라.”
- 악플도 늘었다고 들었다.
“그렇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연약한 사람이기에 백마디 칭찬보다 한마디 쓴소리에 흔들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요즘엔 어처구니없는 악플도 있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스스로 선을 긋고 작품을 보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 “해코지에 대한 두려움 없어…배우는 늘 목숨 걸고 일 한다”
- 주위에서 많은 걱정을 했다고.
“난 안 그런데, 주위에서 이런 저런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나는 두려움이 없는 것 같다. 해코지 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사람’일 뿐이다. 게다가 배우는 모든 작품에 목숨을 걸고 임한다. ‘주몽’을 찍을 때 대역 없이 말에 올랐다. 내가 만약 낙마사고를 걱정했다면 못했을 것이고 여배우의 이미지를 생각했다면 노출 연기를 하지 못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목숨도 내놓고 늘 작품에 임하기에 두려움은 없다.”
- 한혜진은 여장부 같은 역할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다.
“희한하게 그렇다. 감독님들께 캐스팅 이유를 물어보면 ‘네 눈이 그런 눈이야’라고들 하셨다.(웃음) 근데 실제 성격도 결단력 있는 것 같다. 캐스팅 여부도 빨리 생각해서 답하고 쇼핑을 할 때도 빨리 고른다. 어렸을 때부터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생각도 많았다. 내가 집에서 막내딸인데도 언니들에게 ‘일찍 다녀’ ‘조심히 들어와’라고 하고 엄마 역시 나를 아들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웃음)”
- 그래서 그런가, 힐링캠프에서 의외의 엉뚱한 모습이 호평이다.
“의외의 엉뚱함을 보여드려서 좋아하시는 것 같다. 이경규 선배님을 어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니까. (웃음) 정말 존경하는 선배님이지만 촬영이 들어갈 때만큼은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셋이 잘 어우러져서 하는 것 같다.”
- ‘힐링캠프’ MC들은 영화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김)제동오빠는 잘 했다고 하셨다. 이경규 선배님한테는 듣지 못했다. 내일 모레 촬영인데 물어봐야겠다. (웃음) 영화를 제작하는 입장이니 어떻게 보셨는지 듣고 싶다.”
- 차기작이나 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
“차기작은 정해진 게 없다. 하고 싶은 건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우리나라엔 여자들이 맘껏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시나리오라도 쓸까? (웃음) 그런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사진|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