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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앞 막걸리집 ‘고모집’… 82학번 동기들 모인 까닭

입력 | 2012-10-15 03:00:00

“고모님, 30년전 외상값 받으세요”, “情을 어떻게… 장학금으로 낼게”




‘고모집’ 주인 이순이 씨(왼쪽 사진 가운데)가 13일 고려대 82학번 동기회로부터 외상값 385만 원을 받고 있다. 이 씨는 돈을 전부 학교에 기부했다. 첫 번째 주인 한정숙 씨가 가게를 떠날 당시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1993년 4월 17일자 기사(오른쪽 사진). 고대신문 제공, 동아일보DB

"30년 된 외상값을 어떻게 받겠어요? 그 외상값은 첫 '고모'였던 언니와 학생들 사이의 '정'이었죠."

13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캠퍼스 앞 막걸리집 '고모집' 주인 이순이 씨(54·여)가 고려대 82학번 동기회 '아저씨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한 말이다. 30년 외상값이 장학금으로 태어난 이야기는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대 82학번 동기회에서 재학 중 달아놓은 외상값을 갚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하지만 이 씨는 받지 않았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언니도 학생들을 위해 쓰는 게 낫다면서 안 받으셨을 거예요. 그저 학생들이 언니와 가게를 아직까지도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죠."

이 씨는 고모집의 두 번째 '고모'다. 이젠 중년의 신사가 된 고려대 졸업생들이 학창시절 모두 '고모'라고 불렀던 첫째 고모는 한정숙 씨(83·여). 1970년 장사를 시작해 23년 동안 고려대생과 함께했던 그녀는 1993년 카페와 맥줏집 등에 밀려 가게가 어려워진 데다 건강까지 나빠져 이 씨에게 가게를 넘겼다. 한 씨가 물러나기 1년 전쯤 고모집이 문 닫는다는 소문이 돌자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는 대자보를 붙여 재학생들에게 밀린 외상값을 즉시 갚고 맥줏집 대신 고모집을 더 자주 이용해 달라고 촉구할 만큼 정이 깊었다. 한 씨는 가게를 떠날 때 학생들이 술값 대신 맡기고 간 뒤 찾아가지 않은 학생증 수백 장을 고려대 총학생회에 돌려줬다.

더이상 되찾을 학생증도 없지만 13일 오후 고려대 82학번 입학 30주년 모교방문행사를 위해 학교를 다시 찾은 졸업생들은 외상값을 갚았다. 이들의 요청에 못 이겨 외상값을 받은 이 씨는 전액을 장학금으로 학교 측에 전달했다. 외상장부에 적혀 있던 연간 외상값은 350만¤400만 원 수준. 82학번 동기회는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동기들이 모은 돈 중에서 385만 원을 내놓았다.

이은택 고려대 미디어학부 겸임교수(49·신문방송학과 82학번)는 "학교 다닐 때 많이 취하면 고모가 재워주기도 해 여관처럼 여기기도 했다"며 "가게 앞에 앉아서 '째려보고' 계시면 다른 집은 아예 못 간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