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환 국가컴퓨터자판표준위원회 위원장
매년 이맘때가 되면 1960년대 대중에게 널리 보급됐던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해 한글의 기계화에 앞장섰던 공병우 박사(1906∼1995)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그의 혜안(慧眼)과 열정에 탄복한다.
필자는 1975년 한 전문지에 ‘한글타자기 자판배열은 어디로?’라는 글을 연재한 일이 있었는데 이 글을 본 공병우 박사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자택으로 나를 초청했다. 그해 성탄절 전야에 만난 우리는 한글 타자기 자판에 관해 오랜 대화를 나눴다. 공 박사는 내게 “머지않아 도래할 정보화 시대에 사용될 컴퓨터는 속도가 빠른 세벌식 자판이 제격”이라며 “젊은 조 선생이 세벌식 자판을 더 발전시켜 정보화시대에 반드시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
공 박사가 개발한 세벌식 한글 자판은 글쇠에 자음과 모음 외에 받침까지 추가되어 있어 ‘자음+모음+받침’으로 이뤄진 한글에 어울리는 합리적인 자판이다. 게다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2벌식 자판에 비해 속도도 훨씬 빨라 방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컴퓨터에 걸맞은 자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1969년 한글 자판 표준화 작업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한글 자판을 2벌식으로 일원화했고 1982년엔 정보처리(컴퓨터) 자판을 2벌식으로 통일했다. 이후 2벌식 컴퓨터 자판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컴퓨터 자판의 표준으로 2벌식이 채택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1980년대 프린터의 기능이 떨어져 세벌식 자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영향도 있었다. 당시에는 세벌식 자판으로 작성한 문서를 출력하면 빨랫줄에 다른 크기의 옷들이 걸려 있는 것처럼 글자 모양이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지금은 프린터의 성능이 좋아져 세벌식 자판으로 작성해 문서를 인쇄해도 미관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많은 사람이 익숙해진 2벌식 자판을 갑자기 세벌식 자판으로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미국처럼 두 가지 자판을 함께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미국은 현재 영어 타자기나 컴퓨터 자판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쿼티 자판을 표준으로 삼고 있지만 쿼티 자판보다 더 능률적이라고 알려진 드보락 자판도 표준으로 인정하고 있다.
조석환 국가컴퓨터자판표준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