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아 서울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성폭력 범죄를 사적인 사안으로 치부
친고죄란 피해자 혹은 법이 정한 고소권자의 고소가 있어야 공소 제기가 가능한 범죄를 뜻한다. 즉 피해자 등의 고소 없이는 사법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범죄다. 한국의 형법에서 강도강간, 강간치사상, 집단성폭행 등을 제외한 강간, 강제추행 준강간, 준강제추행 등의 성폭력 범죄가 친고죄로 규정돼 있다. 특히 성폭력 범죄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강간죄가 친고죄인 것은 성폭력 일반에 대한 이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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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서 보듯이, 친고죄의 폐단은 고소를 취하하라는 가해자 측의 형사합의 종용에 피해자를 내몰고 이를 거부하는 피해자의 의사를 가해자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로 오인하는 2차 피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고소한 성폭력 피해자가 이러한 수모를 겪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성폭력 범죄 신고율이 대단히 낮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친고죄 규정은 가해자 앞에 놓인 엄중한 법의 집행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피해자 앞에 놓인 높은 장애물의 역할을 한 것이다.
친고죄를 지지하는 쪽에 따르면 친고죄가 피해자의 사생활과 명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를 본 피해자의 명예란 무엇이며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 제도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를 꺼릴 것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성폭력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즉 피해 여성들에게 법의 소추를 회피하는 데 따라 받는 이익이 법의 집행을 통한 공공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보다 우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선택을 개개의 피해자에게 맡기자는 논리가 내재해 있다.
이런 시각은 여성의 성적 순결에 대한 높은 기준, 즉 정조(貞操)에 대한 규범을 가지고 있어 성차별적이기도 하다. 정조 규범을 무겁게 지지 않는 이 땅의 남성들이 누리는 성의 자유에 대한 관용은 여성에 비해 매우 너그럽지 않던가. 또 성폭력 범죄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반하는 범죄라고 하면서도 성적 자기결정권과 거리가 먼 정조 규범을 법이 수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고소의 부담, 피해자에게만 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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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최근 아동 성폭력, 성폭력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처 방식은 그 시선을 비정상적인 가해자의 처벌에만 집중할 뿐 피해자의 주체성 강화, 나아가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규범 형성으로 이어 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성폭력 피해에서 벗어나려면 피해자에게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단지 범죄 피해를 받았을 뿐”이라고 말해 주는 사회적 시선이 필요하다. 친고죄 규정은 이런 시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양현아 서울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