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밑바닥서 다시 일어선 두사람… “자존심 버리니 길이 보였다”
동대문시장과 미국 시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노하우를 평가받아 신세계인터내셔날에 지난해 영입된 노정호 상무.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동대문시장은 천박한 옷만 판다고 생각했어요. 돈 때문에 거길 가야 한다는 게 너무 비참했었죠.”
1997년 12월 국내 굴지의 패션회사 신규 브랜드 팀장으로 승승장구하던 33세의 노정호 씨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신규 브랜드 론칭 계획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그도 해고됐다. 모든 기업이 어려웠던 때라 디자이너로 생활하기 위해 갈 수 있는 곳은 동대문시장밖에 없었다. 그는 “살아야 했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동대문에서 장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광고 로드중
1998년 3월 방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는 동대문에서 ‘어색한’ 장사를 시작했다. 종목은 여성캐주얼. 일단 ‘내 여자친구에게 사주고 싶은 옷’을 골라 도매로 팔아봤다. 첫날 300만 원어치를 팔았다. 그는 “기업에서 한 달에 400만 원 받았는데 이게 뭐지 싶었다”고 말했다.
그날의 상품이 뭔가에 따라 매출은 들쑥날쑥했다. 한 달 시장에서 지내 보니 ‘난 저들과 다르다’고 했던 편견이 완전히 깨졌다. 그는 “시장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고 정직한 곳이라고 느꼈다”며 “브랜드, 마케팅, 학벌 아무것도 소용없고 오직 매장 제품에 따라 잘되기도, 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 실력을 발휘해 청바지에 도전하기로 했다. 당시 도매가보다 두 배 비싸지만 ‘내가 입고 싶은 옷’을 팔기로 했다. 시장 청바지 도매가 3만∼4만 원이면 소매로 7만∼8만 원 했다. 당시 보세에서 7만∼8만 원 주고 청바지를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싸다고 내던지고 가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렇게 1년을 버티던 어느 날 갑자기 주문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루 20장 팔리던 것이 2000장으로 늘어났다. 비싸서 손님에게는 못 팔아도 소매상인들이 ‘내가 입겠다’며 사갔고, 이를 본 소비자들이 ‘어디 제품이냐’고 물었다. 소비자의 반응을 본 상인들이 도매 물량을 갑자기 늘린 것이다.
광고 로드중
미국에서 실패했지만 그의 뛰어난 디자인과 시장 바닥에서 배운 노하우를 높게 산 신세계인터내셔날이 그를 새 브랜드 ‘30데이즈 마켓’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30데이즈 마켓’은 다양한 캐주얼 브랜드를 모아 파는 편집매장 형식의 브랜드로 그의 ‘시장 스타일’ 추진력과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노 상무의 포부는 ‘30데이즈 마켓’을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키우는 것이다. 그는 “마케팅으로 재주를 부리기보다 동대문에서 배운 대로 정직하게 제품으로 승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