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완 사회부 기자
묵비권은 지난달 21일 검찰에 출석한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의 설명처럼 “모든 시민에게 보장된 헌법상의 권리”다. 이 전 대표는 이날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화 경선 부정 의혹에 연루된 혐의로 검찰에 출석해 5시간 동안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는 8월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2시간 동안 진술을 일절 거부했다.
언제부턴가 묵비권은 수사기관에 대응하는 범(汎)좌파 계열의 핵심 전략이자 전통이 됐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상범들이 특히 애용한다. 요즘 사상범들은 검찰 조사실에서 수사관들과 ‘한판 붙자’는 기세로 이념 논쟁을 벌이던 1970, 80년대 좌파들과는 다르다. 묵비권 행사의 효험이 알려지면서 지금은 사기범들도 즐긴다. 경찰이 ‘미란다 원칙’을 말해주기 전부터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며 변호사를 부르고 진술을 거부하는 게 요즘 사기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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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출신의 이 전 대표가 이런 묵비권의 유용성을 모를 리 없다. 조사실에서의 침묵이 수사관을 심리적으로 얼마나 피곤하고 불편하게 만드는지도 꿰뚫고 있다. 통진당 대표를 지냈고 최근 대선후보로까지 나섰지만 검찰에 출석할 때는 ‘시민’이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한껏 낮추면서 탄압받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흥미로운 건 검찰 조사실 밖에서는 말이 많다는 점이다. 이 전 대표는 조사에 앞서 “정의롭지 못한 검찰이 대선을 앞두고 통진당과 저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당장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날계란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 자리에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보세력 탄압에 대한 진실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고 밝혔다. 할 말이 그리 많은데 수사관 앞에서는 어떻게 참은 건지 궁금하다.
최근 이 전 대표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됐다. 말하지 않을 권리를 무언으로 웅변한 결과인 셈이다. 그렇다고 ‘탄압받는 정치인’처럼 비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수개월 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당당하게 입을 열었어야 했다. 헌법이 보장한 ‘도망갈 구멍’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혐의를 벗는 모양새를 유권자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묵비권도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숨쉬고 있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권리다. 정권의 강압수사에 맞서 인권을 지킬 최후의 보루여야 할 소중한 권리가 정치인의 허물 덮기용 수단으로 가치 절하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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