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영 사회부 차장
공포와 수치에 떨던 피해 여성은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고 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겠지만 성폭행당한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되는 게 더 두려운 현실 때문에 멈칫한 듯하다. 다행히 범죄라는 걸 확인한 의사의 신고로 서진환의 추가 성폭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지만 이 대목에서 서진환의 1차 성폭행이 무죄로 결론 나는 상황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피해 여성의 집에 몰래 침입해 성폭행했다. 주거침입 상황이기 때문에 형법상 강간이 아니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3조(특수강간 등)를 적용받게 됐다. 형법상 강간은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재판에 넘길 수 있는 친고죄다. 성폭력 특례법은 3조를 비롯해 13세 미만의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성범죄는 친고죄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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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현재진행형인 친고죄 폐지 논란의 한 단면이다. 친고죄를 유지하자는 측은 그래야 가해자가 피해자 배상에 적극 나선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남성우월적 사고방식의 발로일 뿐이다. 남성의 성폭력에 짓밟힌 여성의 상처를 돈으로 때울 수 있다는 말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사람을 때리고 상처 입히는 범죄는 고소가 없어도 처벌하게 돼 있다. 그런데 유독 여성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강간 등의 성범죄에 대해선 돈으로 해결할 길을 열어 놓은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래된 삼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간하고도 당당하게 수표 몇 장 툭 던져 놓고 “옷이나 사 입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악질 성폭행범이 과연 괜찮다는 말인가.
성폭행은 피해자에게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임에도 가족을 포함해 주변에는 오히려 피해자를 ‘이상한 여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이런 성차별적 관념이 피해자를 더 어두운 구석으로 내모는 것이 현실이다. 성폭행을 친고죄로 규정한 건 이런 점도 고려한 것이지만 잘못된 현실은 고쳐야지 일부러 눈감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지난달 12일 인천에선 세 살짜리 아들과 낮잠 자던 임신 8개월 주부가 성폭행을 당했다. 형편이 어려워 반지하 집에 살면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걸 자책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 끝까지 사랑하며 살겠다. 성폭행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엄하게 처벌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글을 올려 많은 누리꾼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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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