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영예/콘돌리자 라이스 지음·정윤미 옮김/980쪽·2만5000원·진성북스
2005년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이 독일 비스바덴에 있는 미국 군사기지를 방문했다. 기다란 검정 코트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정 부츠 패션은 위풍당당한 매력을 풍기며 ‘워싱턴포스트’ 1면을 장식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신간에서 라이스는 이 패션에 대해 “눈이 내려서 그렇게 입은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었다”고 밝혔다. 진성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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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영예(No higher honor)’.
자서전 제목이 이토록 자신감으로 넘치다니! ‘살아있는 역사’ 또는 ‘역사를 살아가기’로 번역되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의 자서전 ‘Living history’(2003년)에 견줄 만하다. 사실 이 정도 화려한 이력이라면 누가 봐도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겠다. 소련·동유럽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7세에 스탠퍼드대 교수가 된 데 이어 마흔에 스탠퍼드대 부총장에 올랐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이 책은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콘돌리자 라이스(58) 자서전의 국내 번역본이다. 부시 행정부 1기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2기에 국무장관으로 외교정책을 총괄한 시절의 회고록이다. 2001년부터 8년 동안 9·11테러, 이라크 전쟁, 탈레반 축출, 북핵 문제, 그리고 세계 금융위기까지 굵직한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강대국의 고위 관료들이 긴박하게 움직이며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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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역사의 한복판에 선 미국 주요 부처의 움직임을 엿보고 그 정점에 있던 라이스의 심경을 듣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9·11테러 직전의 분위기에 대해 “미국은 9·11테러 공격에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정부 각 기관의 대응 체제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테러 발생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나 우려도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는 대목에서는 최강대국의 안보가 고작 이런 수준이었다는 데 놀라게 된다. 그는 “(테러 다음 날인) 9월 12일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며 이후 안보 문제에 대한 그의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이 참혹한 사건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8년 내내 따라다녔다.
그가 만난 각국 정상들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선 “이상한 성격”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종종 반미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썼다. 지난해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됐을 때 노무현재단은 라이스의 언급을 반박하며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라이스로부터 그루지야(현 조지아) 사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듣고 격노한 장면도 인상적이다. “푸틴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힐을 신은 덕분에 푸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난리가 났을 때 그는 뉴욕에서 페라가모 구두를 사는 모습이 목격돼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선 “주변 상황에 무심했던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책은 주로 공직자로서의 활동에 초점을 맞췄지만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양념처럼 곁들여진다. 음악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준급의 피아노 실력을 지닌 그가 첼리스트 요요마의 제안으로 브람스 음악을 협연한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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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딸을 키운 부모의 교육 비법이 궁금하다면 라이스가 2010년 출간한 가족 회고록 ‘비범한, 평범한 사람들(Extraordinary, ordinary people)’을 추천한다. 아쉽게도 한국어 번역본은 나와 있지 않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