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치부 기자
박 의원 캠프는 반겼다. 가뜩이나 표의 확장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은 2030세대와 중도층의 거부감을 불가피하게 키웠다. 캠프에선 ‘5·16이 정상적 방법은 아니었다’는 의미라고 굳게 믿었다. 박 의원에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박 의원은 측근에게 “당시 정치적 상황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캠프는 멘붕 상태가 됐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후예들은 이제 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르지 못할 신세가 될 판이었다. 2시간여 동안 박 의원을 설득한 뒤에 캠프는 절묘한 답변을 내놨다. “당시 정치적 상황도, 5·16도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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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의원의 질김은 약점만은 아니다. ‘원칙과 신뢰’란 브랜드는 질김 위에 세워졌다. 눈앞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듯한 모습은 오히려 그를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질김은 배려와는 상극이다.
박 의원의 질김에 가장 덴 사람 중 한 명은 김 지사일 게다. 경선 룰 좀 바꾸자며 사정했지만 박 의원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이재오 정몽준 두 의원이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김 지사는 “새누리당의 승리를 위해 내 몸을 바치는 게 대도(大道)”라며 치욕을 감수했다. 그의 측근마저 “벌거벗고 무릎 꿇으라는 데 왜 경선에 참여하느냐”며 길길이 뛰었지만 그는 ‘한신의 길’을 택했다.
한신은 한나라 유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장수다. 그가 시골에 숨어살 때 저잣거리 건달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 치욕을 딛고 대업을 이뤘다.
김 지사가 경선에 참여하며 꿈꾼 대업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정치인생을 걸고 반시장주의, 반자유주의에 맞서 우파의 가치를 지켜보려 했던 것이라 믿는다. 그가 박 의원의 대체재이자 보완재가 될 수 있는 것도 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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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업을 이룬 유방은 한신을 참살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은 한신이 남긴 말이다. 한신의 진짜 치욕은 바짓가랑이를 기어간 것도, 토사구팽을 당한 것도 아니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는 후회했다. 유방에게 진작 반기를 들지 못한 것을.
김 지사는 지난주 뜬금없이 황우여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며 경선 일정을 보이콧했다가 이틀 만에 복귀했다. 그 사이 자신의 가치를 직접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던 KBS토론회를 날렸다. 그는 왜 경선에 참여했을까. 대접받고 싶어서? 진짜 치욕은 무시당함이 아니다. 왜 무시당함을 견뎌냈는지를 잊는 거다. 뒤늦게 후회하는 거다.
이재명 정치부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