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문화심리학자) 김갑수(시인·문화평론가) 윤광준(사진작가) 세 남자의 몽골 여행기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시인 겸 문화평론가 김갑수, 사진작가 윤광준 씨(왼쪽부터)가 몽골 초원 가운데 섰다. 지갑 열 일도, 휴대전화 쓸 일도 없었던 이곳에서 이들은 21세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가 바로 ‘비움’임을 깨닫고 왔다. 윤광준 씨 제공
그들은 텅 비어 있는, 태곳적 광활함만 남은 몽골 초원 가운데 섰다. 한국에서 꽤 잘나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선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이들의 어깨는 가벼워졌을까. 김갑수 씨가 나흘간의 몽골 여행기를 보내왔다.》
“어디든 험한 곳으로 멀리 떠나자”
중년의 사내 셋이 있다.
사내 2가 곁에 있다. 내 식으로 인간의 존재감을 분류하자면 ‘너무 있음’ ‘그저 있음’ ‘거의 없음’으로 나뉘는데 내 오랜 친구 윤광준은 ‘거의 없음’처럼 처신한다. 나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로지 한평생 얼마나 재미있게 노느냐가 그의 인생 목표다. 주업인 사진촬영과 오디오 평론 말고도 종목 나열이 번거로울 만큼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늘 분망하다.
그 둘 사이에 시인이자 문화평론가라는 모자를 쓰고 사는 나, 김갑수가 있다. 평균치 바깥의 이상한 성격과 취향을 타고난 김에 이상한 삶을 살고자 했으나 전혀 이상한 사람이 되지 못한 장르 불상의 프리랜서이자 방송인쯤으로 정리하련다.
자주 어울리는 세 사내의 공통점은 음악과 여자를 유난히 사랑한다는 것, 별 쓸데없는 얘기를 자꾸만 책으로 출간한다는 것, 삶과 존재에 대해 청소년기 때 하던 담론 혹은 ‘구라’를 지겹게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랄까.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자 어깨가 자꾸만 무거워져 간다. 지난 봄날 세 사내가 일본 교토(京都) 기온신바시(祇園新橋) 주점에서 ‘나마비루(생맥주)’를 기울일 때 이런 합창이 튀어나왔다. “우리 어디든 험한 곳으로 멀리 떠나자!”
그렇게 우리는 몽골로 떠났다. 7월 5일 밤 11시쯤 몽골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공항에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산악용 포터 2대가 일행을 태우고 곧장 냅다 달렸다. 서술이 급해지는 까닭이 있다. 몽골에선 모든 것이 ‘냅다’ ‘다짜고짜’였다. 일단 차가 향한 방향이 다짜고짜 비포장 미답지였다. 그 밤에 3시간여를 달려 난가르에 도착할 때도, 다음 날 하루 종일 걸려 솔롱고스 파크 캠프로 갔을 때도 길은커녕 험준한 구릉지가 대부분이었다. 없는 길을 만들며 달리는 사륜구동 차는 덜컹거렸다. 속이 울렁거렸고 괜스레 막연하고 무서웠다.
가는 곳이 길이요 머무는 곳이 집일세
몽골은 달리는 곳이 길이요, 오르는 곳이 정상이다. 윤광준 씨가 사륜 오토바이(ATV)를 몰고 길을 만들며 달리고 있다. 윤광준 씨 제공
몽골에서 ‘다짜고짜’는 길만이 아니었다. 마냥 달리다 보니 밥때가 한참 지났는데 비는 내리고 마땅히 은신할 장소도 없었다. 저 멀리 게르(몽골의 이동식 집) 천막촌이 보인다. 다짜고짜 아무 천막이나 들치고 들어갔다. 몽골 풍속은 과객의 방문을 절대 마다하지 않는단다. 우리는 ‘고두심’의 신세를 지게 됐다. 배우 고두심 씨를 완벽히 닮은 주인아주머니가 웃으며 반겼다. 후줄근한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오삼 불고기를 구우며 법석을 떨어 댔다.
고마워요! ‘고두심’ 아줌마
수천 년 농경정착민의 삶을 살았지만 원래 우리 선조는 유목민이었다. 정착 이래 중국 문명을 전면적으로 수용했고 이어 서구, 그중에서도 미국 문명을 압도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비로소 다시 바깥세상, 인류의 지평으로 진출하고 있는 형국이다. 단서는 디지털이다. 디지털 문명을 그야말로 아방가르드하게 활용하고 있는 우리다. 그것은 무한 가능성일까, 일시적 거품일까.
몽골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이어령 선생과 점심 식사가 있었다. 선생은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가 찾아갈 곳은 미국이나 중국, 유럽이 아냐. 비어 있는 유라시아란 말일세.”
비어 있어 찾아갈 그곳이 바로 몽골이고 중앙아시아다. 휴대전화 장사하고 K팝 유행시키자는 따위의 말이 아니다. 그곳엔 디지털이 없었고 첨단은 무의미했다. 처음을 체험하게 하는 태곳적 상태. 그 광활한 비어 있음은 압도적이었다. 자꾸만 우리 존재의 크기를 가늠하게 하는 몽골 초원의 평화로운 양떼를 떠올리니 무겁던 어깨가 생각났다. 중년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나? 아니 오히려 더 무거워진 건가?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