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대담… 광속 사회 피로감, 아날로그에서 위로받다
대담에 참여한 원재훈 민병일 마영범 씨(왼쪽부터)가 자신의 소중한 물건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원 씨는 30여년 전 구입한 정음사판 릴케 시집과 T S 엘리엇 시집을, 민 씨는 독일 벼룩시장에서 산 몽블랑 만년필과 돈키호테 조각상, 닭장 습도계와 편지 개봉 나이프를, 마 씨는 일본에서 산, 전통 종이를 활용한 조명기구를 ‘나의 물건’으로 꼽았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새롭고 편리한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된 이 시대에 오래되고 불편한 물건을 찾는 이유는 뭘까. 소수의 별난 취미일까. 아니면 그 감촉과 체취를 느끼고자 하는 인간 본능의 발현일까. 민병일 동덕여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53)와 시인 겸 소설가인 원재훈 씨(51), 공간 디자이너인 마영범 SO 스튜디오 대표(55)가 모여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왜 물성을 좇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시간의 속도 vs 시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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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예전부터도 타인과의 교류보다 골방 속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예술가들이 주로 그랬는데, 그들에겐 오디오 바늘이 LP판을 긁어내는 소리 하나도 특별한 의미가 됐어요.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골방 속에 갇혀 살면서 ‘외롭다’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죠. 지나친 경쟁은 이를 가속화했고요. 오히려 지금 옛 물건을 만지고 느끼면서 소통하는 욕구가 더 강해졌어요.
○ 디지털 시대엔 모두가 외로워
마영범=물성이 아날로그에만 존재하고 디지털에는 없다는 사고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물성일 뿐이죠. 어찌 보면 디지털 기기가 촉감을 더 강조해요. 스마트폰의 터치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가진 강점을 합치면, 즉 속도와 품질에 따뜻함까지 더하면 그것이 최고의 물성을 갖춘 물건인 거죠.
민=디지털 문화는 무한복제를 의미합니다. 반면 아날로그 시대의 물건은 그 자체가 원형입니다. 원형은 귀함을 뜻하죠. 귀함 속에는 인문주의와 장인정신, 심미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낡고 불편하더라도 그 물성이 중요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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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과의 이야기가 중요
원=오래전 일기장과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렙니다. 오래된 종이와 펜으로 쓰거나 활판으로 새긴 글씨에서 느껴지는 감성 때문이죠. 제게는 파피루스나 죽간이 가진 가치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를 통해 일기나 전자책이 의미가 없다고 볼 순 없어요. 현대 사회의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아날로그적 물건과 디지털 기기는 그 다양성 범주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민=몇백 년 전 만들어진 인상파 그림을 지금도 우리는 즐깁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그림은 어려워하죠. 모든 것이 과하게 넘치는 시대에 단순하지만 고귀한 아날로그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원=물건 자체가 아닌 물건과의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물성을 느끼는 건 인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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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자>
민병일
시인. 동덕여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독일 유학 시절 라디오, 몽당연필, 주전자 등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수집. 그 내용을 묶어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을 펴냄.
원재훈
시인이자 소설가. 다방면에 자유로운 글쓰기를 실천. 국악방송에서 책 프로그램인 ‘행복한 문학’ 진행. 등잔, LP 수집가.
마영범
공간 디자이너. SO 스튜디오 대표. 의상 디자이너 이영희 씨 매장, 오설록 티하우스, 배상면주가 등을 꾸밈.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