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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수화 영업’ 소리없이 강하다

입력 | 2012-07-12 03:00:00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10개월만에 상조회사 영업팀장 꿰찬 청각장애인 이경호 씨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종합병원 장례식장.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40대 남자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수화로 한 상주와 대화를 나눴다. 뒤에서 불러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왜 이곳에 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그는 말없이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휴대전화번호가 2개 적혀 있었다. 첫 번째 번호는 ‘문자전용’이다. 그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소통의 방식이다. 그는 문자를 한 달에 2만여 통을 보낸다. 하루 평균 700통에 이른다.

두 번째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영업소장의 전화번호로 ‘음성전용’이라고 돼 있다. 상(喪)을 당해 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고객들이 연락을 취할 때 필요한 비상연락처다. 화려한 언변으로 고객을 사로잡아 계약을 성사시켜야 하는 영업사원이지만 그의 상담에는 정작 ‘소리’가 없다.

한여름으로 접어드는 7일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 그가 손을 흔든다. 주말인데도 말쑥하게 정장을 갖춰 입었다. 고된 영업의 길로 들어선 지 이제 11개월. 지난달에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과감히 미용실에 가서 파마도 했다. 만나는 고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싶었단다.

그는 글로 이야기한다. 늘 양복 상의 품에 넣고 다니는 메모지와 펜으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눈다.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지만 목소리를 한껏 높여도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절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펜을 꺼냈다. 수화를 할 줄 모르는 기자와의 대화는 이렇게 종이와 펜으로 이뤄졌다. 또박또박 하얀 종이 위에 펜이 움직인다. 두 차례에 걸쳐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때로는 격정에 찬 듯 빠르게, 때로는 감회에 젖은 양 부드럽게, 힘이 실린 큼직한 글로 조금씩 종이 위를 채워가며 기자를 자신의 과거로 데려갔다.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그 시절로.

상조회사 직원 이경호 씨(47)는 청각장애인이다.

○ 소리를 내고 싶었다

1970년 다섯 살 경호는 이유 없이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열이 심하게 난 지 며칠째인가부터 점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호는 이듬해 미약하게 청력이 남아 있는 왼쪽 귀에 보청기를 꼈다. 오른쪽 귀에 보청기를 껴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등학교는 특수학교를 다녔다. 병치레 때문에 학업은 2년이나 뒤처졌다. 일반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특히 말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성대로 소리 내는 방법을 배우는 고된 훈련이었다.

특수학교 선생님은 경호의 성대를 짚어가며 다른 소리를 내는 방법을 가르쳤다. ‘가슴’과 ‘사슴’을 구분해 발음하기 위해 그는 하루 종일 자신의 성대를 누르며 연습했다. 사슴은 가슴보다 아래턱을 더 내려야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당장 수화부터 배우는 또래 청각장애인과 달리 경호는 소리를 내고 싶었다. 간단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낸 사춘기 소년의 꿈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모는 절박함이었다. 결국 그는 일반 중고교에 진학했다. 수화는 고교생이 돼서야 배웠다.

그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그림과 계산을 좋아했다. 소리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도면 속에서 건물을 그려나갈 때 장애에서 자유로웠다. 큰 별장을 직접 짓겠다는 꿈이 있었다.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1년간 컴퓨터디자인(CAD)을 배웠다.

마침내 그는 중학교 동창의 소개로 건설회사에 취업했다. 동창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이 씨가 맡은 일은 설계도 검토작업. 틀린 부분만 짚어주면 되는 일이라 의사소통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건축가가 되는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결혼을 했다. 특수학교에서 만난 동갑내기 송경인 씨와 연애 7년 만인 1995년 가약을 맺었다. 송 씨도 청각장애인이다. 이듬해에는 딸을 얻었다. 다행히 딸은 장애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조금씩 행복의 의미를 알아가는 듯했다. 1998년 회사가 갑작스러운 부도로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 씨는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설계도면 검토에 능통했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그를 받아줄 회사는 없었다. 방황은 시작됐다. 생계는 액세서리 가게를 하는 아내가 책임졌다. 이 씨의 아내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어떨 땐 그래서 더 미웠다.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다시는 건축가의 꿈을 꾸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 사이 딸은 유치원에 들어갔다.

이 씨는 그렇게 3년을 내리 쉬었다. 2002년 어느 날 친한 청각장애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장을 입고 건설회사에 다니는 이 씨를 부러워하던 친구였다. 그는 이 씨를 서울농아인협회 성북구 지부장으로 추천했다. 옆에서 보기 안쓰러웠다고 한다.

지부장을 맡는 동시에 일도 다시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떡볶이를 팔았다. 중간에 업종도 바꿨다. 아내에게서 물건을 받아 액세서리 노점을 열었다. 벌이가 괜찮은 날엔 하루에 30만 원까지 매상을 올렸다. 가격표만 붙여놓으면 크게 손님과 말을 섞을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단속이었다. 단속을 피해 노점을 접고 달아나기를 여러 번, 이 씨는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출근 첫날 계약을 성사하다

지난해 8월 이 씨는 한 상조회사의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업소에서 주방보조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무턱대고 찾아갔다. 청각장애인이면서도 용기를 내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이 씨를 원재연 소장이 눈여겨봤다. 마침 원 소장은 전화 상담이 어려운 청각장애인 고객을 유치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던 터였다. 청각장애인인 데다가 수화에 능숙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이 씨에게 주방이 아니라 영업을 맡겨 보기로 했다.

이 씨는 원 소장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대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에게 영업사원이란 업무는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흘째 이어진 원 소장의 설득에 이 씨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중학생이 된 딸은 “아빠가 정장을 입고 회사로 출근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이튿날 이 씨는 상조회사 영업사원이 됐다.

‘내가 과연 계약을 따낼 수 있을까?’ 첫 출근길, 이 씨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첫 고객은 아내의 소개로 만난 40대 여성 청각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의외로 만나자마자 흔쾌하게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출근 첫날부터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 씨는 주변 청각장애인을 중심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가입할 생각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소개해 달라고 매달렸다. 이전까지 소통이 어려워 상조 가입을 꺼렸던 청각장애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았다. 상조회사 광고에는 ‘지금 당장 전화하라’며 전화번호만 적혀 있다. 지금 당장 전화할 수 없는 이들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 씨는 청각장애인을 만나려 전국을 누볐다.

영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10건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직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더 놀란 건 이 씨 자신이었다. 그는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기세를 몰아 지난해 12월에는 총 34건을 계약했다. 회사 전체 영업사원 중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실적이었다. 꿈만 같았다.

○ 성공 비결은 ‘조용한 수다’

이경호 씨가 기자와 필담을 나누며 4시간 동안 A4용지에 쓴 글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 씨는 지난달 명함을 새로 바꿨다. 수년 전만 해도 길거리 노점상이던 그는 이제 어엿한 ‘팀장’이다. 그가 맡고 있는 팀원 5명은 모두 청각장애인 영업사원이다. 모두 이 씨가 데려왔다. 이 씨의 영업실적에서 가능성을 엿본 회사가 적극 지원해줬다.

이 씨의 영업 비결은 말없는 ‘수다’. 자신의 굴곡 많았던 인생사부터 책에서 읽은 내용, 주변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화로 동료 청각장애인에게 들려준다. 소통이 그리웠던 동료 청각장애인들은 그런 그의 수다에 말없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 씨의 고객 상당수는 장애 때문에 경제적으로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자식의 장애가 모두 자신의 탓이라며 평생을 가슴앓이 했을 부모를 떠올리며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이제 우리가 부모에게 평생 지운 짐을 덜어줘야 할 때”라며 설득하는 이 씨의 한마디에 동요하지 않는 이들은 없었다. 사실 이 씨 본인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동생이 대신 모시고 사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열악한 교육환경과 경제여건 때문에 사회활동을 기피하는 청각장애인이 여전히 많아요. 조금은 부끄럽지만 내 이야기를 읽고 장애인들이 자신감을 갖고 사회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 씨는 계속해서 종이 위에 글을 적어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A4용지 크기의 종이 여섯 장에 이 씨의 인생이 빼곡히 담겼다. 조금 피곤해진 듯 이 씨는 펜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손가락을 보니 검지가 중지에 비해 굵다. 모양도 울퉁불퉁하다. 기자가 이유를 물으니 “열 살 때 학교에서 친구가 미닫이문을 닫는데 소리를 듣지 못해 손가락이 문틈에 끼는 바람에 모양새가 이상해졌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설명했다.

“내 손가락처럼 울퉁불퉁 상처도 많고 굴곡도 많은 인생이죠. 그래도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해요.” 이 씨는 조용히 펜 뚜껑을 닫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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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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