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한 부모, 예쁘고 똑똑한 아이…현대인들의 오래된 꿈
드라마 ‘추적자’. SBS 제공
사실 이 구도는 오래전에 탄생됐다. 정확히는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다. 그때 나온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언덕 위의 하얀 집’에 살았다. 엄마는 앞치마를 두르고 양식을 요리한다. 아버지는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고. 명문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집에서 늘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한다. 이것이 20세기 이래 현대인을 지배한 꿈이요 비전이었다. 그것을 위해 공부를 하고, 그것을 위해 직업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산다고 할 정도로.
그런데 참 이상하다. 오랫동안 애를 썼는데도 사랑과 결혼은 늘 전쟁을 연출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추적자’를 보면 권력과 자본의 결탁이 그 원흉인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권력과 자본에 동의하는 ‘대중의 욕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백 형사의 복수를 가로 막는 건 권력층만이 아니다. 그의 친구와 동료들이기도 하다. 헌데 그들이 배신을 하는 이유 역시 ‘가족애’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돈으로만 표현된다. 그런 논리라면 재벌 총수의 집안이 최고로 ‘스위트’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기는커녕 더 ‘아수라장’이다. 그래서 정말 궁금하다. 과연 세상에 ‘스위트 홈’이라는 게 있긴 할까?
바야흐로 ‘집의 시대’가 가고 ‘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아파트로 상징됐던 부동산 신화도 붕괴되고 있다. 이제 돌아갈 거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소식인 것만은 아니다. ‘스위트 홈’에 대한 ‘추억과 회한’만 버릴 수 있다면 모든 ‘길’은 집이 된다. 아니 집과 길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