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신은 최고 국빈”… 宋 수도로 가는 길목마다 화려한 고려정
송대 쑤저우 지도 ‘평강도’에 나오는 고려정(점선으로 표시). 위쪽이 창먼 밖의 것이고 아래쪽은 판먼 밖 고려정이다. 고려정과 성벽 사이의 운하는 지금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쑤저우 옛 성벽 바깥에는 지금도 성벽을 따라 운하가 흐르고 있다. 창먼에서 나와 운하를 건너는 다리는 ‘신댜오(新弔)교’인데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나오는 잔위둔(占魚墩) 공원 자리가 고려정이 있던 곳이다.
창먼 바깥은 경항대운하의 길목으로 당시 쑤저우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빈객의 흥을 돋우기 위해 바르는 여인들의 화장품이 물에 섞이면서 수면이 뿌옇게 흐려져 주변 운하를 연지하(>脂河)라고 불렀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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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정관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살았다는 장스화(張士華·85) 씨는 “접관정은 6, 7년 전 인근에 새 다리를 건설하면서 없어졌다”며 고려정 터에서 서쪽으로 400m가량 떨어져 있는 접관정 터를 안내했다. 최부의 기록과 일치했다.
평강도에 따르면 판먼 바깥의 고려정은 창먼 고려정보다 규모가 컸다. 창먼의 고려정은 건물 한 채만 그려져 있는 반면 판먼의 고려정은 건물을 보호하는 담장과 대문까지 보인다. 판먼의 고려정이 있던 곳은 판먼 앞 운하 남동쪽 너머로 보이는 시민공원 자리다.
고려 사신들은 도성 안에 있었던 회원정(懷遠亭)과 안류정(安流亭)에도 묵었다. 통상 도시당 1곳 정도였던 고려 사신의 숙박 장소가 쑤저우에는 창먼과 판먼 밖의 고려정을 포함해 모두 4곳이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창먼과 판먼의 고려정은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쑤저우의 고려정들은 현재 장쑤 성 롄윈강(連雲港) 시에 해당하는 해주(海州)와 현 산둥(山東) 성 자오저우(膠州) 시인 밀주(密州) 판교진(板橋鎭)의 고려정과 함께 건립됐는데, 해주와 밀주의 고려정을 본 소동파(1037∼1101)가 웅장하고 화려한 고려정을 짓느라 힘겨워했을 백성들을 염려하는 시를 지었다는 얘기가 ‘동파전집(東坡全集)’에 나올 정도다. 1119년 발간된 ‘평주가담(萍州可談)’에도 “고려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가장 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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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신종의 고려정 건립 명령은 사행 노선 변경 10년 뒤에 있었다. 그 사이 1079년에는 고려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현 닝보 전하이(鎭海) 구로 바다에 접한 정해(定海)와 현 닝보 중심지에 각각 항제정(航濟亭)과 낙빈관(樂賓館)을 세웠다. 정해 항제정은 2010년 전하이 구 당국에 의해 원래 자리에서 바닷가로 500m 정도 옮겨 복원됐다.
쑤저우 고려정관 설립 30여 년 뒤인 1117년에는 영파(寧波)에 또 다른 고려사관(高麗使館)을 지었다. 1999년 하이수(海曙) 구 웨후(月湖)공원 동편에서 이 고려사관 유적지가 발굴됐다. 이 자리엔 2006년 LG의 후원으로 전시관인 명주여고려교왕사진열실(明州與高麗交往史陳列室)이 세워졌다. 신라인과의 교역, 최부의 표류 등 한국과 중국 동해지역의 교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송은 왜 이렇게 고려 사신 접대에 공을 들였을까. 고려와 송은 962년 국교를 맺은 이후 많은 사신을 보내며 우호교류에 힘썼다. 고려는 송을 통해 새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역을 활성화함으로써 문화 경제적인 이득을 얻었다. 한편 송은 중국 북방에 있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특히 고려가 거란의 공세를 물리친 이후에는 송이 고려사신의 격을 국신사(國信使)로 높여 고려를 대등한 관계로 대우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 명나라 풍속-기후-교통 ‘표해록’에 남겨 ▼
제주도서 배 띄웠다가 표류… 조선관료 최부 옌장 해안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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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터우 산을 찾는 과정에서 만난 옌장 촌 주민 왕장진(王掌金·45) 씨도 최부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왕 씨는 “옌장 촌에는 700가구 2500여 명이 사는데 나이가 제법 되는 어른들 중 많은 사람이 최부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과 중국의 학자 혹은 여행가들이 최부의 표착지를 찾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주민들의 관심도 커졌다고 그는 덧붙였다.
최부는 1487년 추쇄경차관(범죄수사나 도망간 노비를 잡는 일을 했던 관리)으로 제주에 부임했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배를 띄웠다가 표류했다. 대주에 표착한 일행 43명은 처음에는 왜구로 오인을 받았지만 최부가 조선의 관료라는 것이 밝혀져 베이징으로 이송됐고, 무사히 귀국해 중국에서의 체험을 ‘표해록’으로 남겼다.
최부는 표해록을 통해 당시 명나라 연안의 뱃길과 기후, 도로, 관부, 풍속, 군사, 교통, 도회지 풍경 등을 남겼다. 표해록에 그가 소개한 수차(水車) 제작법은 당시 충청 지역에 가뭄이 들었을 때 활용되기도 했다.
타이저우=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