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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차 한잔]‘학살, 그 이후’낸 권헌익 교수

입력 | 2012-06-30 03:00:00

인간은 더불어 살려는 존재임을, 전쟁은 말한다




“인류학계 일부에선 전쟁에서 보듯 인간의 본성은 폭력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론을 뒤엎고, 인간이 마음을 열고 더불어 살려는 존재임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교수(50·인류학)가 2006년 미국에서 펴낸 ‘학살, 그 이후’를 국내 아카이브 출판사가 최근 번역 출간했다. 2007년 인류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기어츠 상’을 수상한 이 책은 1968년 베트남전쟁 때 베트남 미라이와 하미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했다. 수백 명이 학살된 마을에 남은 주민들이 전쟁 이후 망자를 추모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인류학적으로 살핀 연구서다. 책에는 ‘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인류학’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권 교수는 1994년부터 베트남에 수차례 머물며 자료를 수집하고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특히 마을 주민들의 가정의례에 참여해 베트남 특유의 망자 추모 문화를 지켜봤다. 마을 사람들이 직계 조상뿐 아니라 후손 없이 죽은 사람들, 심지어 전쟁 당시엔 적으로 간주했던 망자들까지 포용해 추모하게 된 과정을 연구했다.

권 교수는 베트남의 농부가 들로 일하러 다니면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 군인이 죽은 자리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향을 꽂는 모습을 봤다. 이 마을은 한국 해병대가 민간인 135명을 학살했던 하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권 교수는 전화 인터뷰에서 “학살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편을 들지 않으면 적의 편에 선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지만, 학살에서 살아남은 후손들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인종 민족 종교 사상의 차이를 뛰어넘어 죽은 자들을 모두 평등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위령이라는 행위가 ‘나’와 ‘너’를 엄격히 구분하는 전쟁의 역사에서 자유로운 점이 인상적이었지요.”

그는 이 책에 이어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을 기록한 책 ‘베트남전의 영혼’으로 2009년 인류학계의 또 다른 영예인 ‘조지 카힌 상’을 수상했다.

권 교수는 지난해 말부터 ‘한국전쟁 국제연구사업단’을 꾸려 5년 계획으로 ‘한국전쟁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국제 학술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학자 15명이 모여 지역적 지구적 맥락을 포괄해 6·25전쟁을 연구한다. 연구자들은 최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제목의 국제 학술회의를 열었다.

“6·25전쟁 연구의 양 날개는 국제사적 접근과 사회사적 접근입니다. 그동안 6·25전쟁 연구는 국가 간 힘겨루기로서의 역사에만 치우쳤는데, 이젠 평범한 대중이 경험한 사회사 연구를 통해 6·25전쟁 연구의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권 교수는 “세계사적으로 6·25전쟁이 베트남전쟁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이지만 관련 연구는 훨씬 적은 실정”이라며 “6·25전쟁은 역설적으로 남북한이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통일이 되고 나서도 더 많이 연구해야 할 주제”라고 강조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