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독일과 그리스의 8강 경기를 보러 폴란드 그단스크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독일 기자들은 “잉글랜드보다 이탈리아가 4강에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반적인 전력은 이탈리아가 높지만 독일로선 잉글랜드를 상대하기가 더 까다롭다는 분석이었다. 25일 이탈리아가 연장까지 120분의 사투를 벌이고 승부차기 끝에 잉글랜드를 잡았으니 독일에는 큰 행운이 따른 셈이 됐다.
잉글랜드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올림픽 경기장에서 최악의 축구를 선보였다.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프리미어리그를 보유한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볼품없는 축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웨인 루니(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티븐 제라드(리버풀), 존 테리(첼시), 시오 월컷(아스널)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패하지만 않겠다는 자세로 처음부터 수비에 치중했다. 미드필드부터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패스가 자주 끊겼고 긴 패스가 많이 나왔다. 고집불통 영국 신사같이 너무 융통성 없는 플레이가 이어지다 보니 잉글랜드 팬들도 하품과 야유를 연발했다.
반면 ‘수비 축구’로 통용되는 이탈리아의 미드필드 플레이는 돋보였다. 노장 안드레아 피를로(유벤투스)의 경기 조율 속에 짧은 패스로 잉글랜드 미드필드를 사실상 농락했다. 결정적인 한 방이 없어 연장까지 0-0으로 마쳤지만 결과적으로 이겨야 할 팀이 이겼다. 잉글랜드가 올라갔다면 승리의 여신도 노했으리라.
잉글랜드가 ‘축구 종가’라는 자존심만 내세울 게 아니라 축구나 관중 문화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해야 할 때다. 그러지 않는다면 국가대표 경기에서 세계 축구의 변방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자국 선수보다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아프리카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를 장악하고 있는 데서 오는 부작용을 줄여야 하는 게 급선무다.―키예프에서
허정무 전 축구대표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