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타고난 역도선수” 엄마의 칭찬 한마디가 춤추는 고래로 만들어
여자 역도의 간판 장미란을 키운 어머니 이현자 씨가 강원 원주시 일산동 자택에서 그동안 장미란이 각종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를 배경으로 밝게 웃고 있다. 이 씨는 장미란을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딸”이라고 표현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최중량급(75kg 이상급) 금메달리스트인 장미란은 올해 런던 올림픽에서 2연패에 도전한다. 원주=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어릴 적 유치원 행사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는 장미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해도 장미란은 귀여운 보통 여자 아이였다. 하지만 운동선수로서의 잠재력을 알아본 부모님의 권유로 장미란은 세계적인 역도선수로 성장했다. 이현자 씨 제공
엄마도 처음엔 딸을 평범하게 키우고 싶었다. 여느 여자아이처럼 예쁜 옷을 입히고 피아노 학원을 보냈다.
역도를 시키려고 마음먹은 건 중학교 2학년이던 1997년 여름 방학 때였다. 딸은 아마추어 역도 선수 출신인 아빠의 힘과 뜀박질을 잘했던 엄마의 순발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덩치가 컸지만 학교 체력 테스트에서 달리기와 멀리뛰기를 했다 하면 1등이었다. ‘역도를 하면 잘할 것 같다’고 확신했다. 싫다는 딸의 손을 억지로 끌다시피 역도부에 데려갔다. 그런데 역도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어디선가 “쟤는 남자보다 덩치가 크다”는 말이 들렸다.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한 딸은 곧바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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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챔피언을 키운 칭찬의 힘
출생 당시 몸무게가 4.00kg으로 다소 큰 편이었지만 장미란은 어린 시절 그저 통통한 정도였다. 그림 그리기와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보통 여자 아이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에 들어서면서 먹성이 좋아지더니 살이 찌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 씨의 고민이 시작된 게 이 즈음부터다. “더 먹겠다”는 딸과 “그만 먹어라”는 엄마의 신경전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최근 강원 원주의 집에서 만난 이 씨는 “2년 넘게 체중 조절하라며 잔소리를 많이 했다. 딸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계모’가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장미란이 역도를 시작하면서 더이상 ‘먹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쓰기 위해선 잘 먹어야 했다. 처음엔 싫다며 울고불고하기 일쑤였지만 장미란은 곧장 역도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바벨을 잡은 지 열흘가량 지났을 때 시험 삼아 출전한 강원도내 중학생 대회에서 덜컥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출전 선수는 장미란을 포함해 2명뿐이었다. 하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겐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된 소중한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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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풂과 배려를 가르치다
장미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역도 최중량급(75kg 이상급)에서 세계기록(326kg)으로 금메달을 따며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하지만 최고 스타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겸손하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항상 베풀기 위해 노력한다.
장미란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 한 토막. 고양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2009년 겨울. 역도 선수를 꿈꾸는 형제가 장미란을 만나기 위해 서울 태릉선수촌에 찾아왔다. 장미란은 이들의 고민을 듣고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더니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10여 분 후 장미란은 두 손에 역도화와 잠바를 들고 나타났다. 대화 도중에 형의 역도화 사이즈가 자신과 같다는 걸 들은 장미란이 숙소에 가서 이를 챙겨온 것이다. 그는 “내가 신으려고 사놓은 역도화인데 새 거야. 잠바는 몇 번 입은 건데 미안하다”며 형에게는 역도화를, 동생에겐 잠바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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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은 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위). 어머니 이현자 씨가 “미란이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렸다”고 회상했을 정도로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다. 주로 태릉선수촌에서 생활하는 장미란이 모처럼 휴가를 얻어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아래 오른쪽). 왼쪽부터 아버지 장호철 씨, 여동생 미령, 막내 동생 유성 씨.
○ 고맙다, 사랑한다 딸
장미란은 “엄마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행복하게 역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어머니 이 씨는 장미란을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딸”이란다. 장미란이 원주에 있는 집에 들를 때면 아직도 엄마와 함께 잠을 잘 정도로 모녀 관계는 각별하다. 모녀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이 씨는 “가세가 기울었던 1990년대 말 몇 년간 곰탕집을 했다. 당시 다섯 식구가 식당에 딸린 단칸방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그때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당시는 장미란이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고교생이던 장미란은 힘든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곰탕 그릇부터 날랐다. 두 동생과 함께 설거지와 청소도 도맡아 했다.
식당은 오전 6시에 문을 열어 다음 날 오전 2시에나 닫았다. 집에는 목욕탕이 없어 장미란은 손님이 다 빠져나간 뒤에야 주방에서 몸을 씻었다. 샤워를 하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온 날도 있었다. 그래도 장미란은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이 씨는 “다섯 식구가 사는 그 좁은 방에 피아노가 있었다. 가끔씩 미란이가 피아노를 쳐 줬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렸다”고 했다.
장미란은 7월 27일 시작되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엄마는 마음으로 장미란과 함께한다. 이 씨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란이가 아프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꺼칠해진 손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고생한 만큼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좋겠다.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하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이 씨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힌 듯했다. “힘내, 우리 딸. 고맙고 사랑한다.”
원주=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