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벽에 맘대로 그림 그려라” 감성으로 창의력 일깨워
《 수학·과학 교육 강화의 경쟁력은 인재 양성에 있다. 수학 영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미국 프랑스 등 선진강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우리나라 과학고처럼 인재양성고등학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싱가포르의 영재학교 교육현장을 KAIST 과학영재교육연구원 이영주 박사가 둘러봤다. 》
■ 이스라엘 예술과학고
싱가포르 수학과학고 실험실에 설치된 실험 기자재 ‘자이로 링’. 학생들에게 필요할 경우 싱가포르국립대 실험실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KAIST 과학영재교육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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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교육 경쟁력이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도 수학과 과학에 대한 국가적 투자는 남다르다. 그 한가운데에 이스라엘 유일의 영재고등학교인 ‘이스라엘 예술과학고등학교(Israel Arts and Science Academy)’가 있다.
1990년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유대인 석학 18명이 주도해 세운 이 고등학교는 우리나라 과학고처럼 이스라엘 유일의 ‘기숙형 영재학교’다. 재능이 있고 학습동기가 뛰어난 인재 중의 인재만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학생 선발 과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매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6개월이나 걸린다고 한다.
이스라엘 예술과학고등학교의 한 계단 옆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한 조각품이 전시돼있다. 학교 곳곳에 학생들의 조각과 그림 등 미술품이 설치됐다. KAIST 과학영재교육연구원 제공
학교는 예루살렘 시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있는데도 학교 주변은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굳게 닫힌 철제 교문 안쪽에는 기관단총을 든 경비원이 철저한 보안검색을 했다. 마치 사막 속 요새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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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매년 70∼80명의 학생을 선발한다. 그중 과학 전공자가 50%이며, 음악과 시각예술 전공자가 30%, 인문학 전공자가 20% 정도다. 전교생은 200명 남짓.
수학과학영재 양성을 목표로 한 이 학교가 시각예술과 음악, 인문학 전공 과정을 둔 것은 이 학교의 설립 철학과도 관련이 있다고 ‘교육을 통한 우수성 센터’ 헤츠키 아리엘리 소장은 말했다.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일류를 추구하기 위해 심화학습을 하되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창의적인 사고를 하고 인격적으로도 원만한 인재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술수업이 이뤄지는 강의실에 가보니 벽이 새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학기마다 학생들이 강의실의 빈 벽에 낙서를 하거나 그림을 자유롭게 그려 창의성을 마음껏 표출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학교 측은 설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교육의 토대는 수학과학 영재교육. 이 학교 학생은 전공을 불문하고 공통으로 수학을 들어야 한다. 또 수학과학 전공자는 수학 수준에 따라 ‘정규’ ‘속성’ ‘매스(math)’ 3등급으로 나눠 최고 등급인 ‘매스 코스’ 학생은 3학년이 돼 졸업할 때 대학 수준의 연구 논문을 작성토록 한다. 수업도 철저히 토론식으로 이뤄진다. 아리엘리 소장은 “수업을 하는 강의실 책상은 원탁형으로 유대 랍비(유대교의 현자들을 가리키는 말)들이 문답식으로 지혜를 깨쳤듯이 교사와 학생이 서로 토론하고 묻고 답하는 과정을 중시한다”고 설명했다. 과목당 수업 인원이 많아야 20여 명인 것도 이런 대화식 수업을 위한 것이다. 과학 전공의 경우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 4과목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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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교장을 포함해 교직원 전원이 1년 단위 계약제로 채용되고 매년 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재계약된다. 교원 평가가 엄격하고 업무가 일반 학교 교사들에 비해 많지만 처우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사가 이 학교에 계속 근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이 학교 미술전공 주임교사는 “(국가를 짊어질 인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보람이다”라고 말했다.
이 학교의 연간 수업료는 약 6000달러로 일반고보다 3배가량 높지만 전체 학생의 90% 이상이 장학금을 받는다고 한다. 세계 각국의 유대인 석학들이 결성한 단체가 설립한 이 학교의 운영재원은 각종 기부금과 정부 지원이라고 학교 측은 설명했다.
학교를 둘러보고 나오며 놀란 것은 교육방침이 단순히 공부 잘하는 학생을 키우는 게 아니라 공동체나 유대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점. 이를 위해 매주 2∼3시간씩 지역봉사 활동에도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또 학교는 학기 중 도서관을 24시간 개방하며, 구내식당 냉장고에는 항상 빵과 음식을 가득 채워 놓아 한창 자라는 학생들이 건강을 챙길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 캠퍼스에 둘러싸인 ‘대학 속 고교’… 대학강의 수강하고 실험실도 이용 ▼
■ 싱가포르 수학과학고
이영주 박사
중고교 통합 6년 과정인 이 학교는 2년씩 기초, 고급, 연구과정으로 나뉘는데 연구과정 학생 중 우수 학생은 NUS에서 개설되는 교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대학 과정을 수강한 학생이 161명으로, 이 중 13세인 학생도 있었다고 학교 측은 설명했다. 고등학생들이 대학 실험실 등 시설을 이용하기도 한다. 학력 평가도 각 과목 5.0 만점으로 대학의 평가 방법을 따른다.
이 학교는 인재 양성을 위한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개척자(Pioneer) 성취자(Achiever) 사고가(Thinker) 인도주의자(Humanitarian). 머리글자를 합치면 ‘PATH(여정)’로 말 그대로 싱가포르의 미래를 인도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다. 수학과 과학 분야에 대한 교육과 연구 열정을 고취해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학교의 방침이라고 셰밍쥐안(謝明娟) 대외담당 부처장은 말했다.
교사의 높은 수준도 최고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싱가포르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 학생 수가 1150명인데 교사가 115명으로 교사와 학생 비율이 10명당 한 명꼴이다. 교사들은 전국 교사 중에서 공개 채용된다. 채용된 뒤에도 국내외 대학교수와의 워크숍, 2년간 석사과정 외국 학위 프로그램 이수 등을 통해 전문성을 높이도록 한다. 왕진푸(王金福) 교장은 KAIST 방문단에게 “외국의 유명 영재학교를 두루 다니면서 배울 만한 장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학교에 도입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외국인 학생들의 입학도 허용해 70여 명이 다니며 한국 학생도 16명이라고 학교 측은 소개했다. 이질적인 문화에서 자란 학생들이 서로 교류하며 지적으로 자극을 주는 등 창의성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싱가포르=이영주 KAIST 과학영재교육연구원 박사 ylee2@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