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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남도 350리 영산강이 인문학이다… 삶이 버겁거든 함께 흘러가보라

입력 | 2012-06-16 03:00:00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한승원 지음/300쪽·1만5000원·김영사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영산강 유역의 전남 나주시 동섬. 소설가 한승원은 영산강 유역을 인문학적으로 탐사한 에세이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에서 “강앞에 서면 사람들도 하나하의 풍경이 되고, 역사도 한자락 풍경이 된다”고 말한다. 김영사 제공


영산강. 전남 담양 가마골에서 시작해 장성 광주 나주 화순 영암 함평 무안을 감돌아 목포에서 어머니 같은 바다와 만나는 물줄기. 남도 350리를 굽이굽이 적시는 이 강은 남도 사람들에게 삶의 젖줄이자, 통한의 눈물이었고, 오랜 질곡의 세월을 함께한 넉넉한 반려자였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영산강의 젖줄을 먹고 자란 소설가 한승원은 “지도를 펼쳐 놓고 영산강을 보면, 한겨울철 잎사귀를 모두 잃어버린 노거수(老巨樹) 같다”고 말한다. 수많은 지류는 노거수의 뿌리요 가지다. 서해의 넉넉함이 물줄기를 통해 남도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반대로 남도의 정기가 물줄기를 따라 대해로 뻗어 나간다. 영산강은 이렇게 남도 사람들이 세상과 교류하는 통로이자 합일점이다.

유구히 흐르는 강은 역사의 증인이다. “외래 민족의 침탈, 관리들의 착취와 수탈, 그로 인한 토착 서민들의 저항의 역사, 노령산맥 이남의 굽이굽이에서 태어난 고귀한 인물들의 삶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장엄한 교향곡,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가 됐다.”

책은 영산강 줄기를 짚어 내려온 20여 일간의 현장답사와 자료조사를 덧붙인 인문학적 탐사의 결과물이다. 칠순이 넘은 원로 소설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다. 오랜 세월을 거쳐 자연과 사람이 상호작용하며 빚어낸 정신적 물질적 결정체들을 만나는 여정은 잊고 지냈던 귀한 어르신을 뵙는 것과 같다. 낯설면서도 반갑고 죄송하면서도 고맙다.

화순 운주사는 소박한 돌탑과 돌부처가 널려 있는 불가사의한 곳. 한승원은 일전 거대한 바위에 불상을 아름답고 자비롭게 조탁한 한 조각가에게 그 비결을 물었고 이런 답을 들었다. “나는 불상을 조각하지 않았소. 원래 있던 원석 속에 부처님이 들어 있었는데 나는 그 부처님을 밖으로 드러나게 해 놓았을 뿐이오.”

운주사 돌부처는 예술적으로 정교하거나 뛰어나지는 않다. 서툴고, 순수하고, 투박한 돌부처로부터 수백 년 전해 내려온 무지렁이들의 희망을 읽는다. 없는 손재주지만 정성껏 돌을 조각한 당시 민초들이 남긴 못생긴 불상은 궁벽한 삶을 살았던 그네들의 또 다른 얼굴, 아름답고 슬픈 음화(陰畵)다.

작가는 영산강 유역에서 나고 자란 문인과 화가, 명창들을 꼼꼼히 조명한다. 영산강의 ‘가지’들 속에 혁혁한 인문, 예술적 과실들이 실하게 열렸다. 광주 광산구 월봉서원에서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1527∼1572)을 떠올린다. 26세 연하인 고봉과 아버지뻘인 퇴계 이황이 10년 넘게 주고받은 서한의 정중함과 대쪽처럼 굽힘 없는 주장과 예술 지키기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고 털어놓는다. 고봉의 13세손인 기세훈 고택도 찾는다. “300년 역사를 지닌 고택이 대밭과 소나무, 각종 정원수들과 어우러져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아늑하다. 자연과의 조화뿐 아니라 이 고택에서는 고고한 선비정신이 계승되고 있다.”

강길 따라 이어진 인문학 탐사는 목포에 닿아 끝난다. 해안통의 길바닥, 비린내 나는 푸른 바다, 알토란 같은 유달산,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삼학도…. 일제강점기 수탈의 항구였던 목포는 민초들의 눈물과 한의 정서가 깊게 새겨 있다. “목포의 눈물, 눈물의 목포다.”

‘영산강의 인문 백과사전’처럼 지역 유적과 인물들을 꼼꼼히 다룬 노고가 돋보인다. 하지만 너무 많은 명소와 인물을 소개한 탓에 짧게 ‘나열하는 데’ 그친 듯한 부분도 여럿 눈에 띈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커서 차마 덜어내지 못한 것일까.

알고 나면 직접 보고 싶어지는 법. 작가는 권한다. “내 고향 남도 산하의 젖줄 영산강, 당신의 삶의 고가 잘 풀리지 않거나 삶이 허무하다 싶으면 담양의 가막골 시원 용소에서부터 이 강을 따라 목포 앞바다까지 흘러가면서 볼 일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