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촉 - 냄새 - 소리까지 황홀… 책과 사랑에 빠졌어요
책 제본 공방 ‘렉토베르쏘’ 대표 조효은 씨는 “제본가는 책을 사랑해야 한다. 언제나 책의 내용과 역사가 우선이며, 내가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책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책 제본에 쓰이는 도구들. 실, 칼, 톱, 사포 등 50여 가지가 넘는다. 렉토베르쏘 제공
‘렉토베르쏘(Recto Verso)’란 책의 앞장과 뒷장을 뜻하는 라틴어. 1999년 파리예술제본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순덕 씨가 국내 최초로 문을 연 예술제본 전문공방이다. 2008년 백 씨가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엔 수제자였던 조 씨가 공방을 운영하며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서 전문과정까지 마친 예술제본가는 국내에 15명 정도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2001년 대학 경영학과에 다니던 중에 TV를 통해 예술제본을 알게 됐죠. 처음엔 취미로 배웠는데, 석 달 후에 ‘평생 이 일을 하고 싶다’는 맘이 들더라고요. 학교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10년 넘도록 공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3년 전 한 노신사가 독일에서 구한 괴테의 ‘파우스트’ 초판본을 제본해 달라며 왔어요. 워낙 귀한 책이라 작업하면서 꽤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서양의 제본문화를 알고 계셨어요. 굉장히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주문하셨는데, 작업자로서 귀찮다기보다 제 일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게 정말 고마웠습니다.”
책 한 권에 80만∼100만 원, 기간도 최소 두 달에서 1년씩 걸리는 예술제본을 맡기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문학과지성사는 ‘깊이읽기’ 시리즈의 동인 회갑연 때마다 저자 선물용으로 제본을 의뢰해 왔다. 아내의 박사학위 논문, 20년 동안 쓴 자녀의 육아일기를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책으로 만들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조 씨는 “제본가란 인류의 지적자산인 책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어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전달자”라며 “책을 사랑하는 인문학적 지식과 예술적 감각, 은근과 끈기가 필요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의뢰인이 가져오는 새로운 책을 만날 때 가장 설렙니다. 제본을 하다 보면 책 속에서 메모지도 발견하게 되고, 네잎 클로버도 만나게 됩니다. 책이란 단지 지식만 얻고자 읽는 게 아닙니다. 그것뿐이라면 전자책으로도 충분하겠죠. 책의 무게감, 감촉,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얻는 감성적 위로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종이 질부터 일러스트, 편집까지 정성이 깃든 책을 저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