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진씨, 창비 블로그에 ‘세상살이’ 연재
16일 경기 고양시 장항동 텃밭에서 작물을 돌보는 ‘1980년대 노동문학의 대표작가’ 정화진(왼쪽 사진). 1990년대 초반 홀연 문학판을 떠났던 그가 ‘도시 농부’로 돌아와 20년 만에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1980년대 노동문학을 함께했던 다섯 살 아래 후배 김한수(오른쪽 사진 왼쪽)는 이제 그의 20년 지기가 됐다. 고양=황인찬 기자 hic@donga.com
1992년 가을. 그는 홀연 문단을 떠났다. 뜨거웠던 1980년대에 뛰어들어 용광로와 같은 소설을 썼다가 차갑게 굳어간 이름, 소설가 정화진(본명 황의돈·52)이다.
그가 20년 만에 펜을 잡았다. 지난달부터 출판사 창비의 인터넷 블로그에 산문 ‘도시농부 정화진의 세상살이’를 주간 연재하고 있다. 작물을 심고 돌보는 담담한 일상이 담백한 문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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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귀농 준비죠. 작게 농사도 짓고, 글도 쓰고, 불러주면 강연도 하고. 언젠가는 시골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는 호미를 들고 마늘 밭의 김을 맸다. 이내 주위가 어둑해졌다. 옷의 흙을 툭툭 털고 그가 말했다. “막걸리나 한잔합시다.” 마두역 근처 막걸리집에 마주 앉았다. 20년 전 그렇게 떠난 이유가 궁금했다.
“80년대를 꿰뚫는 서사가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지요. 우리 시대 자화상을 써보려 했는데 30대 초반이었던 나는 너무나 세상을 아는 게 없는 거야. 주변에는 노동자만 있었는데 세상은 노동자만 사는 게 아니니까. 그때 노동자만 뜨거웠나? 대기업 다니는 사람, 선생님, 뜨겁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어. 그걸 아우르고 싶었는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지.”
선인세(350만 원)를 받고도 몇 달 동안 끙끙대던 그는 결국 ‘문학적 한계’를 절감했다. ‘글도 못 쓰는 놈이 가장 노릇도 못 한다’는 자괴감에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서울 강남의 무역회사 영업사원도 하고, 후배 작가 김한수와 액세서리 장사에도 나섰다. 6년간 입시학원 영어강사도 했다. 다시 펜을 잡은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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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판정 나면 마누라에게 ‘산속에 들어가고 싶다. 딱 (소설) 한 편만 쓰고 가게’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때 깨달았어. ‘내가 글쟁이구나, 소설에 목맨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을….”
다행히 ‘물혹’ 판정을 받았다. 병석에서 일어선 그는 산문부터 시작했다. “청년 때는 잡문이라고 생각해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지금은 일주일에 200자 원고지 20장 채우는 것에도 쩔쩔매.” 허허 웃는 그의 얼굴이 밝았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내가 그쪽(운동권)을 떠난 지 오래돼서 내부 사정은 몰라. 하지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발’ 소리가 먼저 나와. 지지해준 국민을 매우 실망하게 만드는, 책임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나머지 말은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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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시 쓰니까 좋은데, 나이 먹은 것 같아 슬퍼. 무역회사 다닐 때 해외출장을 가면 젊은 친구들이 색색의 배낭을 메고 여행하고 있더라고. 그 자유스러움이 부러웠지. 언젠가 나도 한수랑 함께 배낭을 메고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고 싶어. 글로도 남기고 싶고….”
고양=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