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은 한 학기에 한 번 정기 채용설명회만 열어도 인재 확보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학기 중에도 인사 담당자들이 수시로 대학을 돌며 학생들을 만나야 한다. 심지어 공대 동아리 모임과 모꼬지(MT)도 쫓아간다.
전자·정보기술(IT) 기업에서 필요한 R&D 인력은 크게 늘어났지만 공대 졸업생은 줄어들면서 인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단군 이래 최악의 취업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 “취업난?”, 전자업계는 구인난
동아일보가 20일 전국 주요 대학 21곳의 정원 추이를 조사한 결과 2011년 전체 학부 정원은 2003년보다 8.8% 줄어든 반면 전자·IT업계 관련 정원(전자전기, 컴퓨터공학, 기계공학, 재료공학)은 12.9% 감소했다. 재료공학을 빼면 정원은 14.3% 줄어들었다.
지난 10여 년간 청년인구 감소 및 대학원 중심 개편 등으로 대학 정원 자체가 줄어든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학들이 공대 정원은 더 많이 줄인 것이다. 산업계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이공계 기피 현상의 후유증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기업들의 R&D 인력 채용 규모는 크게 늘었다. 삼성전자의 전체 R&D 인력은 2003년 2만1000명에서 지난해 5만2000명으로 증가했다. 최근 수년간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LG전자도 R&D 인력은 계속 늘리고 있다. 2003년 연간 R&D 인력 채용 규모가 1500명이었지만 지난해는 2810명을 뽑았다.
우수 공학 인재들이 기업체 취업에 관심이 없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몇 년간 공대 최우수 학생들의 희망 진로는 주로 의학대학원, 로스쿨, 고시 등이었고 기업체 취업은 한참 후순위였다”라며 “공학을 계속 하겠다는 학생들도 구글 같은 외국기업 취업을 노리거나 유학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 “이공계 최고의 기회”
이공계 기피 현상이 계속되고 있지만 전자·IT업계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이공계 인력에게는 최고의 기회”라고 말한다. R&D 인력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는 데다 기업들이 실력 있는 인재 모셔가기에 혈안이 돼 있어 ‘몸값’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우수 이공계 학생들이 줄줄이 진로로 삼았던 의대, 한의대, 로스쿨 등 의료·법조 분야는 최근 공급 과잉으로 가치가 많이 떨어진 상태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공계 기피의 한 원인이었던 엔지니어 푸대접은 옛날 얘기다. 삼성전자 등 관련 기업에선 임원의 과반수가 이공계 출신이다. 삼성전자 최고위 임원 중 거의 유일한 비(非)공대 출신인 최지성 부회장은 “세계를 돌며 전자제품 및 반도체를 팔았는데 공학을 모르니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용어들을 닥치는 대로 외워야 했다”며 “공대 안 나온 것이 얼마나 한이 됐는지 아들도 공대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체계적인 R&D 인력 육성을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의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선욱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교수는 “한국 기업도 선진국처럼 신입 엔지니어들에게 주식이나 스톡옵션 등 기업 성장의 과실을 나눠줘야 한다”며 “산업에 필요한 인재 공급을 위해 공대 대학원뿐 아니라 학부 정원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