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퇴임美와 벼랑 끝 전술 등 화제… “암벽등반 등 취미도 즐길것”
김 본부장은 한미 FTA 탄생의 주역이자 우리나라 통상정책의 산증인으로서 ‘박수’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2006년 4월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를 맡아 9차례의 끈질긴 협상을 주도한 끝에 이듬해 4월 극적인 타결을 이끌었다.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과 언론은 그에게 ‘글래디에이터(검투사)’라는 별명을 붙여 영웅 대접을 하기도 했다. 그가 미국 측 협상 대표였던 웬디 커틀러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보에게 “우리는 전생에 검투사였을 거다. (검투사는) 죽기 아니면 살기이지만 당신과 나는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된다. 너 살고 나 죽고 나 살고 너 죽으면 일이 될 수 없다”고 말한 이후부터다.
버락 오바마 집권 이후 한미 FTA가 피지도 못하고 사장될 위기에 놓이자 ‘쉼표 하나 고칠 수 없다’고 버티다가 재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올 초 협정문의 번역 오류 문제가 불거지자 용퇴 의사를 밝혔지만 비준안까지 마무리하라는 청와대의 요청에 마음을 추슬렀다. 비준안 처리과정에서는 스스로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4년여 전 협상타결 때 “미국과의 FTA는 불가피하다”며 격려했던 정동영 민주당 의원 등 비준안 반대파로부터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소리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22일 한미 FTA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김 본부장은 다시 ‘쉬고 싶다’는 의사를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물러날 준비를 했다. 대구 출신으로 경북대사대부고, 연세대를 졸업했으며 1974년 외무고시 8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미국 참사관, 국제경제국 심의관, 지역통상국장 등을 지냈다. 그는 며칠 전 모임에서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물러나면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손녀 재롱도 봐야 하고 더 늦기 전에 좋아하는 패러글라이딩과 암벽등반도 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바빠질걸요.”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