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돌림 안시키면 또 당해”강박관념에 약한 친구 괴롭혀
“내가 먼저 ‘왕따’를 안 시키면 오히려 ‘왕따’를 당할 것 같아서요.”
경기도의 한 여고에 다니는 이모 양(16)은 급우들에게 극심한 언어폭력을 행사해 10월 경찰 조사를 받았다. 말끝마다 욕설은 기본이고 공부를 잘하면 ‘잘난 척한다’, 얼굴이 예쁘면 ‘노는 오빠들한테 몸을 대줬다’는 등의 소문을 주도적으로 퍼뜨렸다. 이 양이 집요하게 괴롭힌 학생 중 2명은 학교를 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이 양도 초등학교 때부터 5년 넘게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다. 이 양은 “따돌림을 오래 당하다보면 매사에 많이 위축되는데 나보다 못나 보이는 아이들을 먼저 왕따시키니까 다른 애들이 더는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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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 강자에 붙어 ‘호가호위’하기도 ▼
동아일보가 학교폭력 가해자 상담 기관인 ‘사랑의 교실’ 수강생들의 실태를 파악한 결과 이 양처럼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였다가 가해자로 변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왕따’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더는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친구들을 앞장서서 따돌리고 괴롭히는 것이다.
수도권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김모 군(15)은 교내 ‘일진’들의 ‘군기반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유난히 큰 덩치를 이용해 수시로 주먹을 휘둘렀고 경찰 조사도 여러 차례 받았다. 상담 결과 김 군은 교내에서 ‘잘나가는’ 친구들에게 잘 보여야 따돌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 의붓어머니가 데려온 자녀들 틈에서 자라면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불안심리가 컸던 것으로 파악됐다.
김 군은 상담 과정에서 “내가 나서서 싸움을 걸고 대드는 아이들을 정리해주면 주변 친구들이 ‘역시 넌 의리 있고 박력 있어’라며 인정을 해줬다”며 “집에선 나한테 아무 신경을 안 쓰는데 학교에선 해결사로 주목받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뚱뚱하고 둔하다’는 이유로 자주 놀림을 당했던 김 군은 해결사로 인정을 받기 위해 친구들 앞에서 더 혹독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상담기관 측은 “교실의 강자에게 붙어 호가호위(狐假虎威·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하는 걸 생존 전략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런 심리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가 돼 돌아오는 아이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김 군은 폭력 대신에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인정을 받으라는 상담기관의 권유에 따라 올해 체육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육상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소질을 발휘하고 있는 김 군은 이후 한 번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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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