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바위처럼 든든했던 여덟 살 위 큰형님…‘인술의 길’로 이끌어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나도 따라 의대에 지원했다. 형은 내게 “의사는 우수한 사람보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업이다. 그러니 너에게 잘 맞을 거다”라고 했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서 1지망이었던 의대에 불합격했다. 비록 2지망이지만 서울대에 합격했으니 다니려 했다. 그런 나를 큰형이 말렸다. “인생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라. 내가 주위에서 보니 경기고 출신은 스스로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재수하면서 너도 그런 자만을 버려라.” 내겐 하늘 같던 형의 말이었다. 미련 없이 재수를 택했다. 그리고 이듬해 목표였던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의대생이 됐지만 특출한 학생은 아니었다. 당시엔 고향에 내려가 개업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울대병원의 규모가 커지며 내게도 교수 자리가 주어졌다. 교수가 된 뒤 지도교수님의 권유에 따라 대장암 분야 공부를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지금처럼 대장암의 발병률이 높지 않았다. 주목받던 질병이 아니다 보니 내게 연구 기회가 돌아온 셈이었다.
광고 로드중
한창 대장암 전문교수로 활동하고 있을 때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에 지명됐다. 내가 갈 자리가 아니었다. 암 분야에서 우리에게 신 같은 존재인 김노경 교수님을 모시려 선후배들이 나섰다. 하지만 김 교수님은 오히려 8년이나 어린 후배인 나를 지목했다. “박재갑이한테 맡기면 잘할 거다.” 이 한 말씀만 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해서 1995년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이 됐다. 그 자리에서 ‘암 정복 10개년 계획’을 입안했다. 10개년 계획을 토대로 정부는 국가 암검진사업을 추진했고, 지역암센터도 세웠다. 암관리법이 제정되는 데도 힘을 보탰다. 국립암센터 설립도 주도했다. 새로 문을 연 국립암센터에 김 교수님을 모시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맡지 않으셨다. 그래서 맡게 된 국립암센터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담배의 폐해를 수없이 눈으로 확인했다. 금연운동을 하게 된 계기였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수많은 인연이었다. 어린 시절엔 큰형이 나를 이끌었다. “네가 잘난 사람이 아니다”라는 형의 말은 내 인생을 바꾼 한마디였다. 덕분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 의대에 진학해 암을 연구하고 있는 내 삶의 궤적은 모두 주변의 조언을 살핀 결과였다. 그렇게 의지했던 형이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하다 다른 병도 아닌 대장암으로 눈을 감은 건 마음속 회한으로 남아 있다.
두 번째 인연은 김노경 교수님이다.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과 국립암센터 원장 모두 김 교수님이 내게 넘긴 자리였다. 김 교수님 덕분에 암정복 사업을 시작하고 지금 금연운동까지 펼치고 있다. 그 믿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광고 로드중
박재갑 서울대 의대 외과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