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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하태원]허 찔린 푸틴

입력 | 2011-12-07 03:00:00


‘현대판 차르’로 불리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의 이미지는 마초(남성미)다. 1999년 말 푸틴이 물려받은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늙고 병든 곰이었다. 심장질환으로 임기 내내 식물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보리스 옐친에 이어 집권한 푸틴은 심심찮게 웃옷을 벗어던져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했다. 때론 호랑이 북극곰 고래를 사냥하며 강인한 남성미를 과시했다. 40대 이상 러시아 여성의 푸틴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 반군은 붉은 탱크 앞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그 배후에 푸틴이 버티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제정 러시아의 부활을 꿈꿨다.

▷재선 대통령을 지낸 뒤 2008년 5월 정치 문하생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권력을 넘겼던 푸틴이 내년 3월 치르는 대선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올 9월. 헌법상의 3연임 금지 규정을 피해 4년 동안 총리를 한 뒤 또 대통령을 하겠다는 발상은 과감하고 기발했다. 집권 통합러시아당 대선후보로 공식 추대된 푸틴은 지난달 격투기 영웅 표도르가 미국 선수를 때려눕힌 뒤 축하연설을 하기 위해 링에 올랐다가 관중의 야유를 받았다. 푸틴에 대한 반감이 공개석상에서 드러난 건 처음이었다. 장기집권의 피로감에다 독재에 가까운 강력한 통치에 대한 거부감이 겹쳤다.

▷내년 대선의 전초전인 러시아 두마(하원) 의원 총선에서 통합러시아당이 77석을 잃었다. 450석 중 238석을 차지해 과반을 유지했으니 참패라고 하기도 좀 애매한 상황이지만 분명한 것은 민심이 푸틴과 집권당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당을 대체할 수권세력이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식 민주주의’의 한계다.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라 푸틴이 재집권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대세를 이룬다.

▷젊은 세대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이 푸틴에게 한 방 먹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정선거 사례가 SNS를 통해 신속히 전파됐고 푸틴과 메드베데프를 조롱하는 동영상과 글도 활발히 올랐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재스민 혁명 성공의 1등 공신이자 ‘닫힌 사회’ 중국에 3억 명 이상의 가입자를 불러 모은 SNS가 러시아의 정치문화를 바꿔 놓을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