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 호루라기’… 이젠 한국민주주의의 대안을 내놓다
1992년 3월 23일자 본보 지면.
1992년 ‘군 부재자투표 양심선언’으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던 이지문 씨(43·당시 중위)가 26일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박사논문은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고양을 위한 추첨제 도입 방안 연구’. 이 씨는 이 논문에서 “직접선거로 대표를 뽑는 의회에서 추첨 방식으로 의회권력을 창출하는 추첨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추첨 민주주의’는 쉽게 말해 현재의 선거 방식이 아닌 연령 성별 소득 지역 등으로 전 국민을 분류한 뒤 일정 비율에 따라 대표를 뽑아 ‘시민의원단’을 선출하자는 것. 이 경우 현재 엘리트 중심인 국회보다 서민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국정에 반영될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설명이다.
이번 논문의 출발은 19년 전 그가 군 부재자투표 양심선언을 할 때부터 시작됐다. 이 씨는 “당시 부하에게 부정투표를 부탁하던 중대장의 눈물을 보면서 참을 수가 없었다”며 “부정투표로 엉뚱한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란 생각에 양심선언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 씨의 선언은 군 부재자투표를 영외 투표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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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군 부정투표에 대한 양심선언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이지문 씨가 연세대 교정에서 ‘추첨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 씨는 정치에 뜻을 두고 2000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서울 관악갑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떨어졌으며 2005년부터 내부고발 운동단체인 ‘공익 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을 만들어 현재 부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이 씨는 각종 기관에서 강의를 하고 받는 강의료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은 그동안 해온 내부고발 운동을 한 차원 더 높이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 사회의 부패가 대부분 정치권력에서 나오는 만큼 정치제도를 개선하는 게 한층 높은 내부고발인 셈”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씨도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씨는 “현재 정치권력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두 추첨 민주주의를 반대할 것”이며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주려면 기존 엘리트의 저항과 반대가 있겠지만 이미 국민참여재판 등 추첨 민주주의의 참여 양상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에 첫딸이 태어난다는 이 씨는 “추첨으로 뽑힌 보통사람들이 직접 정책 현안이나 이슈에 관해 논의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칠 때 민주시민으로서 더욱 성숙해진다”며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