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클래식 메카로 만들자”… 고국 교단에 불러주신 선생님
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namjin@donga.com
김대진 피아니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그리고 모든 것의 전환점이 된 곳을 생각해본다. 내가 피아노 선생님이 된 곳, 지금의 학교다. 나를 학교로 불러주신 이강숙 선생님이 떠오른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나는 맨해튼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무대에 섰다. 주변에선 다들 음악활동을 계속하려면 외국에 있는 게 좋다고 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고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집착처럼 고국에 돌아가기를 바란 것은 오정주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점점 더 커져서였다. 오 선생님이 1983년 대한항공 격추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모국의 음악계를 풍요롭게 하고자 했던 선생님의 꿈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서울대 교수 공채에 두 번째 떨어졌을 때 ‘내 꿈은 내 운명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미국으로 가려고 짐을 싸는데 전화가 왔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셨던 이강숙 선생님이었다. “소식 다 들었다. 잠깐 만나자.” 뵌 자리에서 선생님은 “한예종으로 오면 좋겠다. 어떻게 할지 이 자리에서 결정해라”라고 말씀하셨다. 1994년 6월 미국행 비행기가 뜨기 전날이었다. 나는 그해 9월 한예종 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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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를 부를 때에는 노래를 부르고 음악이 요구를 하면 포효 같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며 ‘완’과 ‘급’의 교차를 성공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명과도 바꾸겠다는 예술에의 의지를 개발한 후 끝없는 자기성찰을 계속해 나가면 대성할 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1981년 9월 10일자)
학생도 교수도 많지 않았던 초임교수 시절 이 선생님과 자주 밥을 먹고 술도 마신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예종주’(폭탄주)를 권하면서 분위기를 돋우곤 하셨다.
아시아인을 제외한 클래식계는 이제 상상할 수 없다. 해외 어느 음악학교든 어떤 콩쿠르든 그렇다. 국내에서 기량을 닦은 음악인들이 국제대회에서 잇따라 입상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다. 최근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우리나라 음악가 5명이 입상했다. 이 중 4명은 ‘토종’이다. 음악활동을 하려면 유학을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연주자의 공연에 간다 하면 초대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대부분 공연 티켓을 구입한다. 국내 연주계가 이렇게 정착된 데는 한예종의 노력이 컸고, 나 또한 거기에 동참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 인연을 만들어주신 이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한예종 예비학교 시절부터 내게 배웠던 김선욱 군이 한예종 3학년 때 영국 리즈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순수 국내파 피아니스트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자 큰 주목을 받았다. 그때 이 선생님은 “보고 싶었던 것을 보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선생님이 추구하는 것과 내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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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진 피아니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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