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훼손 방지용” “조선 개국 과시용”
경남 합천군 해인사 대적광전 외벽에 그려진 ‘대장경 이운(移運)’ 벽화. 팔만대장경을 옮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기존 그림을 바탕으로 1990년대 중반에 새로 그린 것이다. 해인사 제공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 1237년부터 16년간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호국 의지를 담아 제작한 세계적인 기록유산이다. 제작 이후 인천 강화도에 보관돼 있던 것을 조선 태조 때 해인사로 옮겼다고 ‘태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목판 1장의 평균 무게는 3.5kg으로 총 8만1350장에 이르는 팔만대장경의 전체 무게는 약 285t에 달한다. 조선시대라면 소달구지 400대 이상이 동원돼야 하고 지금도 옮기려면 8t 트럭 36대가 필요하다.
이런 대규모의 대장경을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언제 어떻게 옮긴 것일까. 또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아쉽게도 구체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이에 대한 추론과 상상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인 학술 논의는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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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이 옮겨진 시기에 대해서는 한 교수와 심 연구실장 모두 1397년에 옮기는 준비작업을 시작해 1398년 5월 10일 강화도를 출발해 1399년 1월 이전에 해인사로 옮겼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태조실록의 짤막한 기록과 만해 한용운 등의 연구를 수용한 것이다.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 교수는 고려 말∼조선 초 강화도 일대에 있었던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을 예로 들면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왜구는 공민왕 때인 1360년 선원사를 포함한 두 곳의 절을 침탈해 약 300명을 죽이기도 했다.
옮긴 경로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한 교수는 “조선시대엔 엄청난 분량의 물건을 옮길 때 가능한 곳까지 수로를 이용했다는 점, 해인사에 남아 있는 대장경 이운 벽화가 해인사 인근 개포(개경포)나루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장면일 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 서울∼충주 구간은 물길을 이용하고 충주∼조령∼문경∼구미∼해인사는 육로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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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성안 스님은 토론에서 “남해 일대에서 제작돼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고려대장경 조성과 강화도 △대장도감의 조직과 역할 △고려대장경의 목록과 교정 작업 △강화도 대장경판당과 선원사 등에 대한 발표와 토론도 진행됐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