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논설위원
부실한 내면, 사치품으로 메운다?
한때는 일본이 ‘명품 공화국’이란 말을 들었지만 요즘은 한국이 바통을 넘겨받은 것 같다. 하루는 출근길에 버스를 탔는데 똑같은 모양의 루이뷔통 핸드백을 든 젊은 여자 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조금 있다 한 루이뷔통이 내리고 다른 승객이 좌석에 앉았는데 그 역시 똑같은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명품의 가치는 희소성에 있는데 이렇게 흔해 빠진 핸드백이라니 차라리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게 패션감각이 있어 보인다.
사실 난 ‘luxuries’란 단어를 ‘명품’으로 번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치품’으로 번역해야 옳다고 본다. 나도 때론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니 명품 소비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오히려 영국 경제사상가 데이비드 흄의 ‘사치론(Of luxury)’에 동의하는 편이다. ‘사치품에 대한 요구가 없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나태에 빠지고,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며, 결국 대중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함대와 군대를 유지하거나 먹여 살릴 수 없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삶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면 우리도 이만큼 살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명품은 그런 갈망의 상징이다. 저술가 알랭 드 보통은 저서 ‘불안’에서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사치품을 통해 지위를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의 은밀한 상처를 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 견해가 맞는다면 명품을 갈망하는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불안한 사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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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이끄는 청년재벌들은 다른 모습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최근 실용과 근검으로 무장한 실리콘밸리의 젊은 사업가들의 생활방식을 소개했다. 금융소프트웨어 회사 인튜이트를 경영하는 에런 패처(30)는 56m²(17평) 원룸 아파트에 살며 39년 된 낡은 구두를 즐겨 신는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세계 언론이 주목을 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흰색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는다. 포브스가 선정한 가장 어린 억만장자인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더스틴 모스코비치(27)는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아파트에 살며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그는 “명품 등을 갖고 있는 나를 상상해 봤지만 이것들로 인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을 창업한 마크 저커버그(27)는 “생전에 모든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태도야말로 진정한 벤처정신 청년정신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청년 사업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벌 2세들이 소박하게 살면서 기부에 열심이라는 얘기를 들어보기 힘들다. 명품 소비만 만연하고 명품 청년정신이 없는 현실을 보며 갑자기 미국이 부러워진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