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 나의 황금기… 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겠다”
작업실에 나가고, 산에 오르고, 운전하고, 여행을 간다. 작가 최인호 씨는 암에 걸리기 전과 똑같이 생활한다. 삶을 소진하는 고통의 축제 속에서 소설을 완성한 그는 “글이 뭔지 알게 돼서 제일 행복하다”고 말한다. 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유쾌한 웃음이 줄곧 폭죽처럼 터졌다. 뭔가 생생히 묘사하고 싶을 때는 손짓과 몸짓이 커졌다. 목소리는 약간 쉰 듯 들렸으나 인터뷰 하는 3시간 내내 그는 기운차게 대화를 이끌었다. 수술과 치료의 흉터가 남은 목을 가리기 위해 두른 목도리, 헐렁한 옷 아래 수척해진 몸을 빼면 그가 3년째 투병 중이란 사실을 깜박 잊을 뻔했다.
12일 낮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 최인호 씨(66)의 표정은 밝고 홀가분해 보였다. 암과 처절하게 싸우면서 썼던 신작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가 출간 한 달여 만에 15만 부를 돌파했고 16일 오후 4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리는 사인회를 시작으로 전국 독자들과 만날 채비도 마쳤다. 그는 “책 낸 뒤 장시간 대화와 사진기자의 촬영에 응한 것은 처음”이라며 “인터뷰 종결자 격인 인터뷰”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에 앞서 방안을 둘러보니 그가 삐뚤빼뚤 연습한 한문 붓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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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좋다. 나의 좌우명이다. 속세다 청산이다, 친구냐 적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네가 옳나 내가 옳나 우리는 시비를 따지고 들지만 봄볕만 있다면 어디든 어김없이 꽃이 피는 것, 내 마음 속에서 분별심을 버리고 봄볕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근데 병을 걸린 뒤 암이 내게는 봄볕이라는 것을 알았다.”
암과의 만남이 어떻게 봄볕이란 걸까. 그가 설명했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지금까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다. 병원은 재수 없고 불운한 사람들이나 가는, 나하고는 상관없는 격리된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가 어영부영하다가 들쑥날쑥하다가 허겁지겁 죽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 “이 자식들아 난 살아있다” 매일 외쳐 ▼
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병은 자랑거리도 아니고, 숨겨야 할 수치도 아니다. 다만 병들어 구질구질하게 힘든 모습을 남에게 보여줘 쓸데없는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3년 동안 은둔했다. 그러나 이번에 신작을 펴내 어쩔 수 없이 세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내가 암을 팔아 앵벌이하려는 생각 때문도 아니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환자에게 그나마 희망과 기쁨을 주고 싶은 소박한 꿈 때문이다. 지난 3년 동안 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영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예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의 집을 찾아가 말한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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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탁자 위 양철통에서 고무 골무를 꺼내 보여준다. 원고지와 만년필을 고수하는 작가는 지난해 10월 27일부터 12월 26일까지 날마다 이 탁자에 앉아 ‘스스로의 열망으로 쓴 최초의 전작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발톱과 손톱이 빠지자 약방에서 골무를 사다 손가락에 끼우고 고통의 축제 속에 글을 완성했다. 그에겐 “작가 인생 50년에 쓴 수백 편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고독한 독자인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쓴 소설이라고 했는데 벌써 15만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익숙한 일상에서 길을 잃은 남자의 사흘간 기록이란 내용이 자칫 난해할 수 있는데, 이런 뜨거운 반응을 기대했는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고통 끝에 탄생된 작품에 독자들이 큰 힘을 보태줘서 나로서는 큰 위안이자 기쁨이다. 돌이켜보면 50년 가까운 작가 인생에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독자였다.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거인 안타이오스처럼 땅에 쓰러지면 나는 독자의 땅에 의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이번에 쓴 작품도 엄청난 에너지로 항상 나를 사랑해주는 독자들의 응원 덕분이다.”
―신작에서 청년작가의 신선함이 느껴진다는 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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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서겠다고 했는데….
“내 문학인생의 제1기는 데뷔해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이었고, 제2기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하여 암에 걸리기까지의 기간이었다. 이번에 나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3기의 문학을 시작하려 한다. 제3기의 문학에서는 지금까지와 달리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쓰겠다. 나중에는 절대독자인 나까지도 사라져버리는 그런 무위(無爲)의 작품을 쓰고 싶다. 모네의 예를 들자. 모네는 알다시피 인상파 그림의 아버지다. 젊은 시절 그는 하루 종일 호숫가에 앉아 수련 위에 비치는 햇빛의 반사를 시시각각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모네가 병원에 달려갔을 때 아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모네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숨져가는 아내의 얼굴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었다. 모네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나는 본받고 싶다.”
어느덧 점심시간. “먹는 게 대단한 전쟁이야….” 점심 식사로 준비한 콩국수를 먹기 전에 그가 말했다. 남들이 수저를 놓은 뒤에도 서두르지 않고 국수를 건져먹고 나선 국물을 나눠 마시며 한마디 던진다. 아내, 딸, 그리고 손녀를 위한 한 모금씩이라고.
3년 전 침샘암 진단을 받은 이후 지도 없는 길에 내팽개쳐진 상태지만 그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 “인생 공부 많이 했다. 야코 많이 죽었지…. 그래도 내가 낙천주의자라서.” 아프고 나서 자신의 장점도 깨달았다. “내가 단점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거든. 와이프도 칭찬 잘 안하는 편인데 장점이 많다고 인정했어. 하여튼 내가 잘 견디는 편이야. 희귀한 환자라고 하더라. 그래도 고비를 넘겼다고 할 수 있나, 늘 현재진행형이지. 작년 겨울에 가장 힘들 때 일주일간 주사 맞고 집에 가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 그때 아파트 앞 복도를 걸으니 55걸음이야. 그걸 50여 번 왕복하면 6000걸음쯤 되더라고.”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였는지.
“나는 작가다. 일곱 살 때부터 나는 오직 작가만을 꿈꿔왔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내 생의 목표다. 정말 쓰고 싶은 글을 한 편이라도 쓰고 죽는 작가는 거의 없다. 그런데 백척간두의 고통 속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작품을 쓸 수 있었고, 그것이 또한 독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니 바로 이 순간이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최근에 나는 이태석 신부님이 임종하기 직전에 들렀던 매괴성당에 다녀왔다. 그곳에는 외국인 신부님 동상이 있고,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받아 온 존재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의 인생은 축제고, 카니발이었으며, 매 순간이 전성기가 아닐 때가 없었다. 요즘이야말로 나의 황금기다. “
인터뷰 말미에 그는 우리네 삶을 매표소에서 표를 사기 위해 무작정 기다리는 모습에 비유했다. 언제쯤 표를 구할지 모르겠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어느덧 내 뒤로 줄선 사람들을 보며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위안을 삼는다. 언젠가 우리는 표를 구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곧 독자들을 만나러 서점에 간다. 의사는 내게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그토록 사랑해준 독자를 만나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악수는 청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감기에 걸릴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리고 잠깐 열었던 사립문을 닫을 것이다.”
그가 “남은 것, 내가 바라는 소원 한 가지”라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년 4월 1일 만우절에 기자회견을 열 것이다. 기자들을 앞에 두고 나는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다. 그동안 여러분을 속여서 미안하다고. 내가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한 것은 외로워서 관심을 끌기 위함이었다고. 그리고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소리칠 것이다. “뻥이야!”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