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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

입력 | 2011-06-25 03:00:00

난 아직도 한강이 신기해




《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한강 너머…온몸으로 푸른 하늘을 인 채 수백 장의 금빛 비늘을 얌전하게 펄럭이고 있던 그것.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63빌딩이다.”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 중 ‘자오선을 지나갈 때’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경험이 몇 가지 있다. 누군가 가방을 낚아채 가진 않을까 몇 시간째 긴장하고 앉아 있던 무궁화호 객차 창 너머 드디어 한강철교가 나타나고, 탁 트인 전경으로 넘실대는 물결이 펼쳐졌을 때 덮쳐온 촌스러운 전율 같은 것. 어떻게 이토록 거대한 강이 도시 한복판을 유유히 가로지를 수 있을까. 생각할 때마다 출구 없는 미로에 떨어진 것처럼 아득해지던 기분. 강이라곤 태어나 처음 본 사람처럼 창문에 코끝을 바짝 대고 감격하고 있을 때, 저 너머 금빛 위용을 뽐내며 찬란하게 나타난 6-3-빌-딩.

이게 이른바 김애란이란 소설가로 대변되는 ‘80년대생(生) 촌년의 감수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여기에 서울역사(驛舍)를 나오자마자 공룡처럼 육중하게 버티고 선 대우빌딩이 주던, 차마 표현할 길 없는 위압감(서울이 상경자에게 선사하는 이 또 한번의 충격은 신경숙의 ‘외딴방’에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다)까지 더해지면 ‘한강→63빌딩→서울역 앞 대우빌딩’으로 이어지는 상경 추억의 3단계가 완성된다.

그런데 이때 받은 인상이 강렬해서인지, 우리는 서울로 들어오던 기억의 첫 관문인 한강을 향해 품은 동경이나 로망 같은 것을 오래도록 거두지 못한다. 서울 생활에 적응이 돼 동서남북 구분도 약간 되고, 얼추 서울식 억양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이후에도, 한강만은 불가항력적이다. ‘서울 사람’처럼 태연히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다가도 뚝섬 근처 한강이 보이면 어쩔 수 없는 촌년 근성이 즉각 발동하는 것이다. 다들 책이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혼자 창에 달라붙어 속으로 ‘아, 한강이다!’를 외친다. 상경 초기에 꼽는 가장 낭만적인 장소도 보통은 한강이다. 어릴 적 봤던 드라마 주인공들은 연애를 할 때도, 실연을 당할 때도 툭하면 한강 둔치를 찾았다. 마치 진정한 서울 사람이 되기 위한 디테일은 그곳에서 완성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선지 거기서 서늘한 강바람에 머리칼 휘날리며 함께 맥주 한 캔쯤 마셔줘야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한강을 볼 때마다 절로 터지던 탄성의 데시벨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 낮아지긴 했어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엄연히 존재한다. 출퇴근하기 위해 매일 서강대교를 건너는 요즘에도 나는 흔들리는 버스 한편에 앉아 뿌연 아침 안개에 잠긴 강, 그 푸른 물비늘들의 움직임을 잊지 않고 한참 동안 바라본다. 해가 진 뒤 버스 창을 열면 선선해진 저녁 강바람이 다리 위를 달리는 차체 속도만큼 빠르게 밀려든다. 그 바람을 쐬며 바라보는 검푸른 강물, 거기 비친 도시의 일렁이는 빛 그림자, 멀리 느릿느릿 점멸하는 남산N타워 항공장애등의 붉은 신호는 퇴근길 버스에서 무심히 누리기엔 사치스러울 만큼 아름답다. 고단한 하루에 지친 만원버스 샐러리맨들 사이에 끼어 그 풍경을 볼 때마다 매번 새롭게 읊조리게 된다. 아, 한강이다…, 라고.

사실 한강 주변에는 마천루의 향연도, 수백 년도 더된 웅장한 고적(古跡)들도, 넘실대는 해협의 활기참도 없다. 자세히 보면,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플래카드가 붙은 아파트들 천지다. 하지만 한강 다리 이름 몇 개쯤 가뿐히 읊고, 웬만한 시내버스 노선쯤 꿰뚫게 된 지금까지도, 우리에겐 한강이 여전히 ‘그냥 강’ 이상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 한강이다’란 앳된 첫 탄성 속에 담겨 있던 그 시절의 부푼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기 위해서였든, TV 시트콤 ‘논스톱’ 같은 대학생활에 대한 (곧 산산조각 날) 환상을 품은 채였든, 긴장과 두려움으로 얼어 있던 스무 살 우리에게서 가장 먼저 희열의 탄성을 끌어낸 것은 그 무엇도 아니라 한강이었으니까. 열차 창틀에 턱을 괸 채 도도한 물살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 도시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많은 꿈들은 지금쯤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매일 출퇴근길 버스 차창에 기댄 채 물끄러미 한강을 내려다보는 나의 심장은 여전히 그때처럼, 낮게 두근거린다.

appena@naver.com

톨이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인 말기 이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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