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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답한다]Q: 日지진 성금 등 왜 타인을 도울까

입력 | 2011-04-18 03:00:00

A:혈연집단 시절 협동 성향 발전




《재해를 입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낯선 사람까지 돕는 이런 행동은 유전자에 각인된 것일까. 왜 타인을 돕는 것일까.(ID: another**)》

아기가 울어댄다. 초보 엄마는 쩔쩔매며 아기를 달랜다. 기내의 대다수 승객은 울음소리를 못 들은 척한다. 몇 명은 부드러운 미소까지 띠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다. 옆 좌석에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독서에 푹 빠진 청년도 실은 젊은 엄마를 배려해서 그러는 것임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보는 익숙한 풍경이다. 아주 가끔, 정말로 짜증내는 승객도 있지만 배려의 분위기를 망칠 정도는 아니다.

당연한 풍경인가. 영장류학자 세라 허디는 승객이 전부 침팬지라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해 보라고 권한다. 서로 처음 보는 침팬지들을 좁은 공간에 몇 시간 동안 집어넣어 놓으면 대재앙이 터진다. 기내에는 선혈이 낭자하게 흐른다. 팔다리를 멀쩡히 붙인 채 비행기를 빠져나오는 침팬지는 거의 찾기 어려울 것이다. 온순하기로 이름난 보노보도 끔찍한 아수라장을 만드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 인간은 다른 어떤 영장류보다 더 협동적인 동물이다. 끊임없이 서로의 속내를 읽고 헤아린다. 생판 모르는 누군가가 어려움에 부닥쳐도 내 일인 양 안타까워하며 온정의 손길을 내민다. 대지진으로 최악의 피해를 본 일본을 돕고자 세계 각국에서 지원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쓰촨 성 대지진, 미국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도 그랬다.

왜 인간은 이토록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기꺼이 도움을 베풀까. 국경과 이념을 초월해 자선을 행하는 모습에 고무된 이들은 인간은 매몰찬 경쟁만 강조하는 다윈식 적자생존의 논리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주장한다. 공감과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 모든 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사람을 돕는 ‘무조건적 사랑’은 인간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수백만 년에 걸쳐 고작 수십 명, 많아야 100여 명인 작은 혈연 집단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굳이 내 피붙이와 남을 구분하지 않더라도, 내 앞에서 고통받는 누군가를 도와준다면 이러한 ‘도움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자연 선택’으로 후대에 더욱 잘 전달될 수 있었다. 내 도움을 받은 상대는 내 유전적 혈연이어서 그의 몸속에는 ‘도움 유전자’의 복제본이 들어 있을 확률이 평균적으로 0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희생(손실)이 상대에겐 엄청난 구원(이득)이 된다면 나와 상대의 유전자 모두를 고려한 입장에선 ‘양의 이득’이 발생한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집만 나서면 친구나 직장 동료 등 비친족을 종일 마주치는 현대사회에서는 먼 과거의 소규모 혈족 내에서 자연 선택된 혈연 이타성이 때때로 오작동을 일으킨다. 모닥불을 교미신호로 오해하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말이다. 일본의 이재민들에게 돈을 기부하면 내 생존과 번식에는 손실이다. 그러나 바로 내 앞에 선 누군가가 가슴을 치며 비통해하는 표정과 목소리에 깊이 공감하게끔 진화한 우리는 천리만리 떨어진 이재민의 오열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화면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상대가 내 혈연 집단의 일원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이타성은 쉽게 잦아들기도 한다. 일본이 독도 왜곡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키자 국내에서 일본을 돕기 위한 성금 액수는 급락했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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