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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국립소록도병원 본관 리모델링 감회 17년째 외길 ‘오동찬’ 의료부장

입력 | 2011-04-11 03:00:00

소록도行 반대했던 암투병 어머니, 나중엔 “환자를 엄마처럼 대하라”




‘소록도의 마리아’로 불리는 마거릿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 마거릿 수녀는 27세 때 동료인 마리안 수녀와 함께 소록도에 와 43년간 한센인들을 보살폈다. 두 수녀는 2005년 11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도 할 수 없고, 소록도에 부담만 줄 것 같다”는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소록도를 떠났다. 오동찬 씨 제공

# 지난해였다. 초등학교 6학년인 큰딸이 민족사관고의 방학캠프인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GLPS)’을 신청했을 때 그는 내심 고민이 많았다. 4주간의 캠프 비용이 300만 원이나 됐기 때문이다. 국립소록도병원 의료부장 월급의 10분의 8이나 되는 액수였다. 그런 돈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래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으니 너무 기뻤다”며 ‘팔불출’처럼 딸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걱정은 또 있었다.

한방에 같이 지내는 아이들 대부분이 서울 강남, 서초구와 목동 아이들이고,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3, 4년 생활하다 온 것은 ‘기본’이라는 것이었다. 딸아이가 아는 세상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살았던 소록도와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사 온 순천이 전부였다. “혹시 기죽지 않았어”라고 묻자 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 내 고향이 소록도잖아. 나한테는 바다도 있고, 낚시도 할 줄 알아. 그리고 영어야 나도 할 줄 아는데 뭐!”

고향이 소록도라는 게 자랑스러운 아이. 지금 중학교 1학년인 그의 큰딸이다.

#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딸. 아빠와 함께 캄보디아로 의료봉사를 다녀온 후 “건축가가 되겠다”고 했다. 메콩 강가에 늘어서 있는 현지 주민들의 집을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오동찬 의료부장은 매일 소록도 공원 안의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한다. 공보의로 시작해 만 16년간 국립소록도병원을 지키고 있는 그는 이곳이 가장 추억에 남는 곳이라고 했다. 어떤 추억일까. 고흥=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그랬던 둘째가 지난해 학교 문집에 이런 글을 썼다. 아마 글의 주제가 ‘미래의 나’였던 모양이다. “나는 지금 아프리카에서 진료 중. 일손이 부족해 엄마 아빠를 ‘호출’했다. 남극에 가 있는 언니도 호출했다.”

건축가에서 의사로 꿈이 바뀌었다. 아빠가 “그런데 언니 꿈은 치과의사인데 왜 남극으로 보냈어”라고 묻자 둘째는 “글쓰기 전날 언니하고 싸웠어”라며 웃었다.

오동찬 국립소록도병원 의료부장(43)한테서 ‘딸 자랑’을 듣고 있는 동안 알지 못할 행복감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마치 맑은 샘물 한 바가지로 오장육부를 씻어낸 뒤처럼 청신(淸新)한 기운이 솟구쳤다. ‘능수매화가 피면 소록도에 봄이 온다’고 한다는데, 기자가 소록도를 찾은 8일엔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인터뷰 기행은 원래 ‘소록도의 귀염둥이’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1995년 조선대 치대를 졸업하고 서울 강남성심병원에서 1년간 수련의 과정을 마친 뒤 소록도 공중보건의를 선택한 오 부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1000여 한센 환자의 귀염둥이가 됐다.(지금은 601명으로 줄었고, 평균 연령은 74세나 된다) 치과 진료만 마치면 환자들이 모여 사는 이른바 ‘환자지대’를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할매, 뭐하고 있소. 밥은 먹었당가.” 만나는 사람마다 안부 인사를 건넸고, 때로는 밥도 차려 달라고 했다. 아무 집에나 벌렁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처음엔 ‘감시하러 온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던 고령의 환자들도 점점 그를 손자나 아들 대하듯 했다.(경향신문 1997년 11월 4일자)

마침 8일은 국립소록도병원이 본관 리모델링 공사를 끝내고 25년 만에 새로 태어나는 날이었다. 겸사해서 ‘귀염둥이의 그 후’를 듣는 게 인터뷰의 목적이었는데 기자는 아빠보다 딸들 이야기에 매료됐다.

―요즘은 전국의 의대, 치대, 한의대를 찍고 서울대를 지원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의과대학 들어가기가 어렵다던데….

“꼭 의사가 아니더라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베풀 수만 있다면 좋겠다. 간호사도 좋고 교사도 좋다. 학원 한 번 안 보내고 한 달에 1만7000원 내는 스카이라이프 디즈니채널만 10년 가까이 보고 있는데 큰애는 외국인과 프리토킹을 할 정도가 되더라. 빈민층 의료봉사활동을 나가 이주 외국인들을 치료할 때는 큰애가 통역을 하기도 한다. 그 장면이 올해 초 EBS에 방영됐는데 사람들이 ‘어느 학원 다니느냐’고 하더라(웃음). 꿈을 선하게 가지면 공부도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학교 들어가면서 순천으로 이사했다고 하던데 그럼 매일 출퇴근하는 건가.

“주말에만 간다. 개원을 했으면 매일 아이들을 볼 수 있을 텐데…. 그게 늘 미안하다. 그 대신 방학 때면 아이들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소록도에 와 지낸다. 마을 할아버지들하고 낚시도 하고. 사실 얼마 전 자전거를 타다가 다쳤는데 아이들이 다시 소록도에 와서 아빠랑 같이 지내겠다고 해서 고민이다. 그 문제는 둘째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되면 다시 생각해보자고 유보해 놓긴 했는데….”

―혹시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다룬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아는가.

“작년 말에 KBS 팀이 여기 와서 틀어줬다. 원래 꿈이 이태석 신부처럼 사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오라는 곳도 있었고, 병원도 여기저기서 오라고 했지만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고, 치과 진료과목 중에서 구강외과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중국이나 아프리카엔 언청이 환자가 많다. 안면기형을 수술해 주는 것, 이게 내 꿈이었다. 나도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웃으며)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잖아요?”

그는 공보의로 있을 때 소록도에서 6년째 일하고 있던 간호사 이승희 씨와 결혼했다. 환자들이 치과 진료만 마치면 의사는 쳐다보지 않고 ‘이 간(호사)’만 찾았다. 아내는 그렇게 그의 가슴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치료’와 ‘치유’의 차이를 깨달았다. 치유는 마음이었고, 믿음이었다.

여하튼 환자들은 300원, 500원, 1000원이 담긴 축의금 봉투를 내놓으며 “우리 ‘이 간(호사)’ 울리면 죽을 줄 알아!”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부인은 간호사 일을 그만뒀다고 하던데 혹시 서운해하지 않나.

“둘째 낳은 다음 내가 집사람에게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했다. 공보의 3년차 때 결혼했는데 당시 내 월급은 32만 원이었지만 집사람은 정규직 간호사라 120만 원이나 됐다. 둘째 낳을 때쯤엔 사무관 월급이 180만 원으로 올랐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집에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집사람은 7급으로 승진한 지 한 달 만에 그만뒀지만 지금은 이주 외국인 아줌마들과 놀며 (순천 생활에) 감사해한다.”

―이태석 신부도 ‘불효자’였지만, 오 부장 부모님도 반대하셨을 것 같은데….

“의대 본과 2학년 때까지 학생운동 하느라 뛰어다녔는데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나님께 ‘당신 뜻대로 살겠다’고 기도했다. 다행히 수술을 할 수 있게 돼 5년을 더 사셨다. 그런 어머니도 내가 소록도에 간다니까 ‘나 죽은 다음에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소록도에 온 지 1년쯤 지났을 때 고집을 꺾고 다니러 오셨다. 환자들을 보시더니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엄마한테 하는 대신 환자들을 엄마처럼 대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3개월 뒤 돌아가셨다. 나는 불효자다.”

―요즘은 병원 사정이 좀 나아졌나.

“올 초까지만 해도 나하고 피부과 과장님 빼고 나머지 진료는 거의 공보의가 다했다. 과거엔 일반병원에서 한센인 진료를 거부해 산부인과 빼고 내가 다했다. 내과 전문의가 아니기 때문에 약 주고 1시간 내내 배 만져주는 게 다였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한센인 특별법도 만들어졌고, 원장님과 나, 간호부장이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를 쫓아다닌 끝에 올해 간호사 정원도 9명이 더 늘었다. 소록도 환자들은 모두 1, 2급 중증장애인이다. 주사만 놔주는 간호사가 아니라 밥도 먹여주고, 일상생활도 돕고, 간호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한다. 손이 많이 필요하다. (웃으며) 나만 할 일이 없다. 그래서 고민이다.”

―2009년 3월에 소록대교가 완공돼 육지와 24시간 왕래가 가능해졌고, 한센인에 대한 편견을 부추겼던 낡은 주택과 병원도 현대식으로 바뀌었는데 ‘외부인의 인식’도 좀 달라지지 않았나.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전국에 한센인 정착촌이 90여 곳 있는데 아직은 ‘그들만의 마을’이다. 한국은 아직 한센인과 더불어 사는 환경이 안 된다. 한 번 물어 보자. 김 기자님은 아마 아파트에 살 텐데 아파트 옆에 한센인 마을이 생긴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한센인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도 있다. 가끔 환자들과 함께 밖에 나가서 자장면을 시켜 먹곤 한다. 자장면 먹는 걸 좋아하신다. 그런데 ‘바깥 분들’이 나한테는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습니다’라며 반기지만 환자들에겐 그냥 그릇을 내던지다시피 한다. 환자들은 환자들대로 고개를 숙이고 5분 만에 자장면을 털어 넣고….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안 된다. 참, 그리고 기자님은 고속도로에서 뭘 사먹거나 쉬고 싶을 때 어디를 찾습니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겠죠? 한센인은 1년에 한 번 서울에서 열리는 후원의 밤 행사에 갈 때도 휴게소를 못 간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한센인들만 가는 데가 있다. 휴게소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배려 때문이겠지만 한센인들이 스스로 좀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아까부터 ‘일이 없어 고민이다’ ‘마지막 소원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혹시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건가.

“(웃으며) 만 16년 동안 내가 한 건 별로 없다. 일제강점기부터 웃을 일이 없는 분들이라 내가 줄 수 있는 건 웃음밖에 없다.”

그는 갑자기 기자에게 “요즘 일본 원전사고 때문에 소금을 사재기 한다는데 소금을 비싸게 파는 방법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소금을 소하고 금으로 나눠서 팔면 된다”며 “요즘엔 이런 걸로 환자들을 웃긴다”고 했다.

행복한 인터뷰였다.chang@donga.com 
::이것 만은 알아두자::

‘편견의 병’ 한센병, 결핵보다 덜 무서워
한센병은 ‘편견의 병’이다. 이것 하나만은 알아두자. 한센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마이크로박테리움 레프래(Mycobacterium leprae)로,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과 ‘한집안’이다. 치료약도 비슷하다. 무서운 걸로 따지면 결핵균이 나균(癩菌)보다 100배나 더하다. 나균이 100배나 약하다는 말이다. 결핵은 1년이나 약을 먹어야 하지만 한센병은 3개월만 먹어도 균이 다 죽는다. 그래서 결핵예방접종인 BCG를 맞으면 99.9% 예방할 수 있다. 한센 환자들보다 더 중증장애인은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때 ‘문둥이들이 간을 빼 먹으려고 아이들을 납치했다더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신문과 방송에 옮긴 우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