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매물도
매물도 등대섬이 3월의 아침햇살 아래서 환희 빛나고 있다. 섬 중턱에 항로표지관리소 관사가 보이고 그 아래로 썰물때만 드러나는 자갈톱이 보인다. 소매물도의 망태봉(해발 152m)에서 촬영.
○ 엔젤호 여객선으로 즐기는 봄 한려수도 유람
여객선은 한산도, 비진도를 차례로 지났다. 도중에 서너 곳 들르는데 사람도, 짐도 바삐 오르내렸다. 긴 한산도의 끝. 다리로 이어진 추봉도가 보였다. 세종 원년(1419년) 이종무 장군의 쓰시마 정벌 당시 삼도해군 집결지다. 이어 비진도. 안 섬, 바깥 섬을 연결한 모래톱 해변이 멋지게 다가왔다. 매물도는 비진도 오른쪽이다.
광고 로드중
매물도에선 두 번 섰다. 당금, 대항 마을이다. 소매물도는 그 다음이다. 섬을 보자. 산이 바다에 풍덩 빠진 형국이다. 그러니 맨 비탈이다. 평지라고는 없다. 폐교, 선착장이 유일하다. 집도 산자락에 들어섰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올망졸망 모였다. 분화구 내벽 급경사에 계단처럼 집짓고 사는 산토리니 섬(그리스 에게 해)이 생각났다.
여객선 엔젤호가 매물도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왼쪽 큰 섬이 매물도고 오른쪽으로 소매물도와 등대섬이 차례로 보인다.
하산은 매물도 탐방로(총연장 5.2km)를 따랐다. 길은 서쪽 끝에서 바다를 끼고 마을로 돌아오는 산기슭 중턱으로 났다. 전망이 기막혔다. 마을 조금 못 미쳐 개활지가 펼쳐졌다. 꼬돌개다. ‘꼬꾸라졌다’는 뜻의 섬 방언 ‘꼬돌아졌다’에서 왔단다. 두 해 걸친 흉년과 괴질로 초기 정착민이 모두 숨진 아픈 역사가 담겼다. 여기는 해넘이 명소다. 분홍빛 해가 욕지도 너머로 졌다.
○ 모세의 기적처럼 열리는 바닷길의 등대섬과 소매물도
대양을 향해 흩어져 나간 한려수도의 수많은 섬 중에서도 가장 먼 바다에 자리잡은 매물도의 장군봉에서 바라다본 소매물도와 등대섬. 오른 쪽 산자락의 나무 아래 허리춤으로 새로 낸 탐방로는 이런 풍광을 즐기며 걷는 멋진 길이다.
광고 로드중
○ 한국의 산토리니, 당금마을
낚싯배로 매물도에 돌아온 건 오전 9시 반. 이번엔 당금마을을 찾았다. ‘어부밥상’은 게서 맛보았다. 이 특별 메뉴는 식당 없는 매물도에서 어민들이 직접 차려낼 ‘특미'다. 올여름부터 내는데 3만 원(2인 기준)이다. 기대했던 밥상. 과연 미역 볼락 천국이라는 매물도다웠다. 볼락과 열기(노란빛 도는 볼락 종류) 구이에 파래, 가시리, 몰, 톳 등 해초가 성게로 맛을 낸 돌미역국과 함께 나왔다. 그런데 반상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전채(前菜)로 낼 ‘성게 미역쌈’이다. 돌미역에 성게 알을 올려 쌈해서 먹는다. 섬주민이 직접 딴 것만 낸다는 게 이 밥상을 차려낸 노을민박 주인 김정희 씨의 설명. 벚굴(벚꽃 필 때 섬에서 잡히는 석화)샐러드, 문어 톳밥, 참소라물회 소면 등도 준비 중이다.
3월에 매물도의 꼬돌개에서 감상하는 한려해상수도의 해넘이. 중첩된 섬은 가까이부터 가익도 소지도 욕지도다.
○ ‘가고 싶은 섬’ 매물도의 예술섬 프로젝트
광고 로드중
▼케이블TV에 가로등도 있지만 밤이면 적막 흘러 낯선 섬생활▼
‘생활거리’ 가꾸기로 설치된 매물도 당금마을장의 문패.
재니스 프롤리흘러라는 한 여행가의 독백이다. 그는 세상 곳곳의 섬 스물다섯 개를 여행했다. 그런 뒤 ‘세상의 모든 섬이 내게 가르쳐준 지혜’라는 책을 썼다. 섬에 대한 그의 상념은 이렇다. ‘섬은 느림과 단순함이라는 마법으로 내륙의 광기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여유를 찾아주는 지혜의 공간이다.’
봄기운 어린 남해 쪽빛 바다에 둘러싸인 매물도. 이틀간 머문 뒤 아쉬움을 접고 통영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비진도와 한산섬을 아우르는 한려수도 뱃길. 1시간 20분 항해 중 내 머릿속을 맴돈 건 섬의 ‘단순함’과 ‘느림’이었다.
섬에서 첫날 오후 내내 낫 든 채 길잡이 해주신 칠순 이장님. 풀 이름 묻는 질문에 대답은 늘 엉뚱했다. “이건 몸에 좋아, 이건 안 좋아.” 그분에게 세상 풀은 딱 두 종류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당금마을의 민박집. ‘어부밥상’ 차려낸 부산 출신 오십대 여주인도 비슷했다. 매물도에 놀러왔다가 섬사람과 사랑에 빠져 섬사람이 됐다는데 대화를 나누다보니 그녀 역시도 섬과 남편, 이 둘이 세상 전부였다.
매물도에도 케이블TV가 나온다. 가로등도 있다.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펜션 같은 민박도 있다. 이것만 보면 도시와 진배없다. 그러나 삶은 아니다. 마치 다른 혹성 같다. 우선 사람 기척이 드물다. 밤엔 아예 없다. 소음도, 불빛도 찾기 힘들다. 길은 좁고 너무 가팔라 자동차는 무용지물. 당금마을에만 몇 대뿐, 다닐 길도 없다. 도시사람에겐 정말로 낯선 풍경이다. 시간 개념도 다르다.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잔다. 서두름도 없다. 잠까지 줄여 시(時)테크에 목숨 거는 우리와는 다르다. 오후 8시가 자정인 곳. 거기가 섬이고 여기 매물도다.
이틀간의 매물도 체류. 매사는 ‘불편’으로 일관됐다. 낯설기로도 어느 외국 못잖고. 그랬다면 고개 내저으며 떠나게 마련.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꼭 뭘 두고 가는 듯 왠지 아쉽고 마음이 ‘짠’했다. 단순, 소박, 느긋함이 빚은 ‘여유’에 중독돼서다. 그것도 딱 하룻밤 새. 섬에는 섬만의 시간이 있다. 섬의 여유란 게서 온다. 그 여유 얻자고 도시에 섬 시간을 가져갈 순 없다. 그건 섬에서만 통용되니까. 그러니 떠나자. 매물도로. 거기 가서 찾아보자. 세상 모든 섬이 가르쳐준 지혜를.
통영·매물도=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 여행정보
매물도에서 맛볼 수 있는 어부밥상의 한상차림. 앞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성게알 미역쌈, 가시리, 몰, 볼락 열기구이, 부침, 벚굴.
◇통영 ▽찾아가기 △손수운전: 대전통영고속도로(무주 산청 진주 경유) 이용. ‘거가대교’를 경유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이용해 거제를 거쳐 간다. △고속버스: 서울남부터미널(02-521-8550)에서 4시간 소요. ▽맛집 △충무김밥: 통영은 ‘충무김밥’의 고향. ‘충무시’와 ‘통영군’이 현 통영시로 통합되기 전 통영시의 옛 행정지명(충무시)을 그대로 담은 향토음식이다. 김밥집은 통영여객선터미널 건너편 서호동 길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중 ‘원조 풍화김밥’(주인 김영식·서호동 177-354)은 1·2호점을 둔 토박이식당. 김밥(8개 1인분 4000원)을 참기름, 계란말이와 함께 낸다. △대양수산해물(주인 신종철): 굴과 멍게, 전복을 대량 수집, 전국에 택배로 판매하는 식당 겸 유통점(도남동 634). 미륵산 케이블카역에서 가까운 통영유람선터미널 1층(선착장 앞 바닷가)에 있다. 통영 굴은 4월까지 나는데 현 시세는 kg당 8000∼9000원. 올 대풍인 멍게도 4월까지 제철로 1kg(껍질을 까지 않은 것)에 5000원. 이 식당에서는 싱싱한 굴과 멍게, 전복을 싼값에 먹을 수 있다. 055-644-4980, 010-4205-2508. 상가 1층에는 통영누비, 건어물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