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선 이 회장의 주문을 가장 충실히 따른 케이스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을 꼽는다. 한 와인 수입회사 관계자는 “이 사장은 삼성에버랜드 전무(지금은 사장)를 겸한 2009년부터 맹렬한 속도로 와인을 익혀 지금은 와인에 관한 한 ‘리틀 이건희’란 별명이 딱 맞게 됐다”고 말했다.
200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 때 국내에선 구하기 힘든 1982년산 프랑스 ‘샤토 라투르’를 대접했던 이 회장은 지난달 보광피닉스파크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2018년 겨울올림픽 평가단을 영접할 땐 2003년산 프랑스 ‘푸피유’를 내놓아 각별한 관심을 모았다. 푸피유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재배한 포도로 담근 10만 원대 친환경 와인으로, 몇 년 전 해외 블라인드 와인 테이스팅 대회 결선에서 수백만 원짜리 프랑스 ‘페트뤼스’와 맞붙기도 했다. 페트뤼스 애호가였던 이 회장이 저력을 갖춘 친환경 와인을 내세워 평창의 건강한 이미지를 홍보하려고 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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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LG그룹 회장은 평소엔 ‘밸런타인 21년’ 같은 위스키를 즐긴다. 하지만 해외 VIP가 방문하면 경기 광주 곤지암리조트에 있는 자신의 개인 카브(와인저장고)에 데려가 취향에 맞게 골라 마실 수 있게 배려한다고 한다. 호주의 ‘카트눅 오디세이’는 그가 워낙 즐겨 마셔 ‘구본무 와인’으로 불린다. 골프광인 구 회장은 퍼터 브랜드 ‘오디세이’와 이름이 같다고 수백 병씩 이 와인을 주문한 적도 있다. 오너들은 ‘골프와 와인의 공통점’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눈다. ‘너무 좋아하면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상대를 배려해야 성공하며, 한번 빠지면 탈출하기 어려우며, 내공이 쌓일수록 더 좋은 것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삼성 오너 일가가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주로 마시는 반면 LG는 호주와 뉴질랜드, 칠레 등 ‘신대륙 와인’을 마신다.
오너 일가라도 세대별 와인 취향은 갈린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은 보르도 그랑크뤼 2등급인 ‘코스데스투르넬’을 즐기고, 지인들에게는 1등급인 ‘샤토 마고’를 선물한다. 보수적인 맛을 지닌 최고급 와인들이다. 반면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여태껏 안 마셔본 와인에 도전하는 실험정신이 강하다고 한다. 정성이 이노션 고문 등 정 회장의 세 딸은 비싸지 않은 화이트와인(소비뇽 블랑 품종)을 마신다.
와인을 마시는 취미를 통해 신사업을 모색하는 오너들도 있다. 이탈리아 ‘사시카이아’를 즐기는 와인 전문가 수준의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내년에 ‘한국의 명품 막걸리’를 만들 계획이다. 한방화장품 ‘설화수’로 ‘코리안 럭셔리’를 이룬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한국인 와인 메이커 박재화 ‘루뒤몽’ 사장의 집을 종종 찾아가 양조 과정을 지켜본다. 와인 수입사 ‘신세계 L&B’를 세운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최근 트위터에 추천한 ‘도멘 세실 트랑블레’는 부르고뉴의 ‘차세대 스타 와인’. 국내에선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와인업계가 그의 ‘와인 내공’에 새삼 놀랐다는 후문이다. SK 오너 일가들은 상대적으로 와인보다는 맥주를 더 즐긴다고 한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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