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대사 황급히 찾아와 10분간 대화… 그날밤 北 ‘南과 동시가입’ 성명 발표”
▽1991년 2월=노태우 대통령이 노창희 당시 대통령비서실 의전수석비서관을 불렀다. 노 대통령의 지시는 단호했다. “올해 유엔에 태극기를 꽂아 내가 유엔본부에서 가입 기념 연설을 할 수 있게 하시오!” 노 수석비서관은 곧 유엔 옵서버 대사로 신분이 바뀌었다.
▽4월=노 대사는 4월 초 ‘북한이 끝까지 동시 가입을 반대하면 한국이라도 우선 가입을 반드시 추진할 것’이라는 각서를 유엔 전 회원국에 배포했다. 유엔을 향한 ‘출사표’인 동시에 북한과 중국에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너는 각오로 불철주야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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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박길연 북한 옵서버 유엔대사가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노 대사의 접촉 시도를 번번이 거부하던 터라 이상했다. ‘혹시 북한이 입장을 선회하려는 건 아닐까.’ 그러나 박 대사를 만난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박 대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평양의 지시에 따라 남측의 공식 입장을 확인하려는 것이니 정확히 답변해 달라”며 3가지 질문을 급하게 던졌다.
“첫째, 단일 의석 공동가입이라는 우리의 합리적인 제의를 왜 거부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문제 해결을 위한 성의 있는 제안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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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수없이 반복된 논쟁인데 이제 와서 재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시 가입이 안 되면 단독 가입을 기어이 강행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미 공식문서로 그렇게 하겠다고 만천하에 선언했습니다. 북한은 착각하지 마세요. 대통령이 국민 앞에 유엔 가입을 분명히 약속했는데 그것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박 대사는 이렇다 할 반박도 없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노 대사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본국 지시라며 질문 요지도 미리 준비해 왔으면서 그 이상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돌아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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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외교부 성명에서 “우리는 북남 유엔 옵서버 대표 사이에 접촉을 가졌다. 접촉에서 남조선은 유엔 단독가입은 불변이라는 것을 거듭 주장하며 그 어떤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 대사는 그 대목을 읽으며 박 대사가 왜 그토록 황급히 만났는지 깨닫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북한이 남한과 의미 있는 접촉을 시도했다는 점을 선전하기 위해 일종의 ‘연극’을 꾸민 것이다.
북한은 리펑 총리가 1991년 5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의 유엔 가입을 더 반대하긴 힘들다”고 말한 뒤 태도를 바꿨다는 후문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