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단기채권 회수만 종용… 사업다각화 투자 소홀업계 “회사 살려준다더니 손발 묶인 식물기업만 양산”
“인공호흡기를 투입해 숨은 쉬게 해줬지만 회복이 더디다고 목을 졸라버리는 격입니다. 워크아웃 절차 없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8일 아파트 브랜드 ‘월드메르디앙’으로 알려진 월드건설이 워크아웃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워크아웃 중인 다른 건설사들의 볼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공능력평가 71위인 월드건설은 2009년 4월 부동산 경기 악화에 따른 자금난으로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국내 부동산 경기 침체로 월드건설 사태가 도미노처럼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기업을 살리려는 취지의 워크아웃 제도가 건설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권단에 의해 손발이 묶인 ‘식물 기업’을 양산하고 있다”며 ‘워크아웃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워크아웃에 들어간 건설사들이 회복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국내 건설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반증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 수술 받고 회복된 환자 한명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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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돼 현재 워크아웃 중인 한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채권단이 단기채권 회수만 종용하고 사업 다각화를 위한 투자나 지원에는 소홀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어 분양을 통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채권단이 자산 매각을 추진하면서 각 기업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잃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월드건설 관계자는 “강남 사옥, 사이판 리조트, 한강신도시 주택개발 용지 등을 모두 매각하면서 성장 동력을 잃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부실자산과 알짜 자산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싼값에 내다팔게 하고 그 대금은 몽땅 가져가버려 워크아웃 기업의 회생을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이다.
○ 제조업 워크아웃과는 달라야 한다
채권단이 건설업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은 채 제조업 구조조정 방식을 건설사에 강요하면서 부작용을 양산한다는 지적도 많다.
민간 주택경기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워크아웃에 들어간 건설사들이 자구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공공공사,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개발사업, 재개발·재건축 등을 통해 매출을 올리고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 하지만 워크아웃 기업이라는 ‘주홍 글씨’ 때문에 공사이행보증서, 선급금보증 등을 발급받지 못해 공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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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아웃 기업이 정상화되지 못하는 것을 채권단의 책임으로만 몰아붙일 수는 없다는 시각도 많다. 신응호 금융감독원 기업금융개선국장은 “금융기관으로서는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금리가 인상된 때에 모든 리스크를 떠안고 공격적으로 투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 워크아웃 제도 보완해야
이처럼 국내 건설 업체들의 모순이 노출된 상황에서 ‘워크아웃 무용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미비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해 말 폐지된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을 조속히 다시 제정하면서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 현재는 기촉법의 효력이 상실돼 기업-채권단 간 자율협약을 통한 워크아웃이나 파산·법정관리 등의 방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금융위 관계자는 “워크아웃 개시 단계에서 채권단이 해당 기업과 협의를 거치도록 하고 워크아웃 채무재조정 과정에서 은행 간 자율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기업도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할 권리를 주는 등 기업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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