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공드리 감독(왼쪽)과 주인공 그린 호넷(브릿 레이드)을 연기한 배우 세스 로건. 유례를 생각해내기 힘들 만큼 추레한 행색과 외모의 액션히어로다. 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가슴을 때리는 영화는, 그것과 처음 마주한 공간을 기억에 새긴다. 내게는 그렇다.
미셸 공드리(48)라는 프랑스 출신 감독의 연출작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 내 기억 속에 차지한 시공간은 2005년 겨울밤 신촌 극장에서 마포 집까지 내리밟은 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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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본 '수면의 과학(The Science Of Sleep, 2005년)'은 공드리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했다.
꿈속 경험과 현실의 경험을 혼동하는 남자가 한 여인과 어렵사리 맺어가는 알싸한 로맨스.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서 기괴한 음색의 폭소를 아무도 웃지 않는 타이밍에 연신 터뜨려 하필 바로 옆에 홀로 앉았던 내게 주변사람 시선이 다 쏠리게 한 빌어먹을 얼간이 녀석만 없었다면, 망아지 인형을 태운 조각배가 둥실 흘러가는 라스트 신에서 마음 놓고 의자에 파묻혀 눈물을 내놓았을 거다.
3년 뒤 다시 만난 공드리의 영화는, 불안했다. 2009년 국내 개봉한 '비 카인드 리와인드(Be Kind Re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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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종이 계란판과 두루마리 화장지 심을 잇대 만든 '수면의 과학' 꿈속 TV 스튜디오의 낭만적 위트와는 결이 달랐다. 영화공장 할리우드에 대한 편견일지 모르지만, 잭 블랙의 좌충우돌 원맨쇼는 아무리 좋게 봐도 그저 계산된 웃음을 뽑아내기 위해 적소에 배치한 상업적 장치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2년. 27일 개봉한 공드리 감독의 7번째 장편 '그린 호넷'은, 자그마치, 슈퍼히어로 액션물이다.
요즘 블록버스터의 대세이자 최대 격전장이 되고 있는 장르의 연출권을 얻었으니,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유럽 출신 감독 대열에 든 것일까.
지구를 구해야 할 숙명의 굴레도, 부모를 앗아간 범죄자들에 대한 피 끓는 증오도 없다. 그린 호넷이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밤거리를 누비는 것은 그냥 ‘그렇게 하는 게 폼 나고 재미날 것 같아서’다. 유치하지만, 묘한 사실감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군들 안 할 텐가. 그렇다면 그 근본적 동기는 과연 ‘정의감’일 수 있을까. 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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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그렇지 못해 보인다.
홍보문구에 강조한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철없는 백만장자' 이야기나 '히어로 계를 긴장시킬 액션 히어로의 새로운 역사'는, 없다.
이 영화는 비중 차이가 상당한 두 액체를 흔들어서 억지로 잠시 섞인 듯 해 놓은 불균질 혼합물을 닮았다. 부조화와 불협(不協)에서 배어나는 독특한 분위기에 야유를 보낼지 즐거워할지 여부는 취향에 따라 방향이 크게 갈릴 것. 시사 중 객석에서 간간이 터진 웃음은 즐거움에 겨운 폭소라기보다 어처구니없음에 내뱉는 '헉' 소리에 가까웠다. 공드리 감독의 전작들이 좋았다고 해서 이 영화에 만족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친구가 볼까 말까 내게 묻는다면 "달리 볼만한 게 영 없다 싶으면 보라"고 답하겠다.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1960년대 이소룡 출연의 미국 ABC TV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진 바 있는 '그린 호넷'은 배트맨을 버전다운 한 가내수공업 형 히어로다. (슈퍼히어로라 하기에는 많이 민망한, 그냥, 히어로.) 언론재벌의 망나니 아들 브릿 레이드가 갑작스레 부친을 잃은 뒤 능력 있고 싸움 잘 하고 두뇌 명석한 조수의 도움을 얻어 완전무장 방탄 슈퍼 카 등 각종 장비를 갖춘 액션 영웅으로 거듭난다는 설정.
배트맨과 비슷하게 재산을 파워의 원천으로 삼았지만, 악당에게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가면을 뒤집어쓰고 범죄와 전쟁을 벌이는 우울한 반영웅 배트맨과는 밑바닥부터 딴판이다.
갑부임에는 틀림없지만 재력의 레벨이 배트맨보다 한참 떨어지는 그린 호넷은 가면을 처음 뒤집어쓴 이유도 브루스 웨인보다 저열하다. 생전에 늘 자신을 꾸지람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동상을 망가뜨리는 장난을 치기 위해 변장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가 우연히 범죄자들과 마구잡이 싸움을 벌인 것이다.
이 장면은 118분의 상영시간 중 몇 안 될 ‘그린 호넷이 조금이나마 멋있게 나온 장면’ 중 하나다. 슈퍼맨의 초능력? 배트맨의 아크로배틱과 첨단무기? 그도 아니면 킥 애스의 무통각 깡다구? 그가 가진 것은 오직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넉넉한 유산과 재간둥이 조수뿐이다.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게다가 주인공 그린 호넷은 재산을 빼면 아무 잘난 것 없는 허울뿐인 존재다. 길거리 싸움에 휘말려 신나게 쥐어터지고 있던 그린 호넷은 조수 '케이토'의 현란한 무술 솜씨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진다. 부족한 능력 탓으로 자주 발목잡이 걸림돌이 되는 배트맨의 사이드킥 '로빈'과 달리, 케이토는 무기 개발과 작전 구상은 물론 현장 전투까지,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은 혼자서 다 도맡아 해내는 만능 천재 캐릭터다. 좋게 말하면, 브릿 레이드는 자본력을 틀어쥐고 저작권을 행사하는 투자자, 케이토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생계'와 약간의 '재미'에 매달려 온갖 고생을 감수하는 제작자라 할 수 있다. 나쁘게 말하면? 그냥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버는' 꼴이다.
그린 호넷과 조수 케이토의 ‘액션히어로 놀이’는 철없는 아이들의 컴퓨터게임 즐기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감독이 공드리가 아니었다면 그 설정만으로도 그럭저럭 흥미로웠을 것이다. 감독이, 공드리가, 아니었다면. 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케이토는 아시아인이다. 갱 조직을 초토화하고 로스앤젤레스의 밤을 지배하는 아시아인 액션히어로가 미국 사회에서 용납될 수 있을까. 발생 자체가 요원할뿐더러 설령 등장한다 해도 이소룡 또는 그 아들 브랜든 리처럼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타깃이다. 그린 호넷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아시아인 케이토는 얼뜨기 백인 재벌 브릿 레이드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덕에 그런 위험에서 자유로워진다.
부조화와 불협. 그린 호넷이 언제나 2인 1조로 움직이는 것은 두 사람(인격)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합체 히어로'인 까닭이다.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 하나의 몸을 가진 상이한 두 인격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린 호넷이라고 이름 지은 괴상하고 어설픈 히어로의 가면 뒤에, 결코 친구 사이가 될 수 없어 보이는 두 인물이 필요에 의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린 호넷이라는 닉네임을 지은 사람도 레이드가 아니라 케이토다. 케이토의 닉네임이 끝까지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는 것은, 그를 떼어낸 그린 호넷에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린 호넷은 '킥 애스'처럼 만화 속 슈퍼히어로들의 허풍에 "웃기시네!"라고 조롱을 던지며 경고하는 전복적 영화가 아니다. 브릿과 케이토의 대화는 시종일관 그저 철없는 애어른들의 허세 가득한 이죽거림으로 채워진다. 그 철없는 딴죽에 뚜렷한 비판의식이나 까댐의 대상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매력도 명확하게 똑 떨어지지 못하고 모호해졌다.
뭐랄까. 누군가 "그 여자, 매력이 뭐냐"라고 물었다 치자. "음…. 딱히 미인도 아니고 지적이지도 않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독특한 점이 있는 것 같긴 해. 그렇다고 사귀자고 대시하기에는 망설여지는 느낌…?"
목 빠지게 기다린 공드리의 새 영화. 딱 그 정도다. ★★☆(다섯 개 만점)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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