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침공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충격과 공포’ 작전은 ‘이란이 공을 많이 들인 속임수’라고 할 수 있다. 이라크전쟁으로 이란의 숙적인 미국은 크게 쇠약해졌다. 따라서 ‘테헤란’(이란 당국을 지칭)이 은밀한 배후조종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3년째 취재 중인 뉴욕타임스의 로버트 워스 특파원은 아랍사회에 만연한 이 ‘누구에게 이익인가’ 사고방식에 아주 질렸다는 표시로 종종 이 ‘이론’을 진지하게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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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작가 체스와프 미워시는 그의 역작 ‘사로잡힌 마음’에서 지식인과 스탈린 전체주의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 관계의 핵심은 (지식인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레바논은 겉으론 자유분방함 그 자체다. 소비에트 치하의 어두침침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레바논은 스스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무력한 인간의 굽실거리는 사고방식을 보인다. 하지만 레바논은 아랍세계의 한 극단적 사례일 뿐이다. 인터넷과 새로운 미디어도 수십 년에 걸친 억압과 허약함에 길들여진 아랍세계의 마음을 아직 열어젖히지 못했다.
친서방 반시리아를 외쳤던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는 2005년 베이루트 도심에서 암살됐다. 시리아 요원들이 의심을 받았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유엔 법정이 꾸려졌다. 이 사실은 레바논의 기구와 제도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레바논의 허약함을 반영한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사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누구에게 이익인가’ 열풍에 휘말렸다. “암살로 누가 이익을 보는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시리아와 저항세력에 대항해 지역적 분쟁을 일으키려는 수단으로 만든 불법 기구다.” 헤즈볼라계 알리 파야드 의원은 말했다.
레바논 사람들은 의심하며 묻는다. “하리리 암살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 법정을 꾸렸으면서 파키스탄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 암살 사건은 가만 두는가.” 이런 의심은 너무 확고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어렵게 만든다. 사로잡힌 아랍 마음의 희생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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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시는 억압받는 세계에서 ‘몽상(夢想)과 망상(妄想)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강력한지 설파했다. 나는 레바논에서 많은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동이 ‘(서방)음모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은 바꾸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역량 강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조짐도 찾지 못했다. 아랍세계는 여전히 그렇게 전진한다.
로저 코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