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제러미 리프킨 지음·이경남 옮김/840쪽·3만3000원/민음사
‘공감의 시대’의 저자는 인간의 본성에 공감적 특성의 씨앗이 뿌려져 있으며 인간은 서로를 아끼는 상호의존적 존재라고 강조한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군에서 원유 유출사고가 발생하자 국토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과지역 주민이 처한 어려움에 공감한 자원봉사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기름띠 제거 작업에 동참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저자는 번역서 기준 800여 쪽에 달하는 이 엄청난 분량의 책을 통해 우리 인류 내지는 인간의 본성에 공감적 특성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었으며 이러한 공감의 능력 내지는 공감의 문명이 처음에는 가려져 있다가 지속적으로 발현되어 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예와 이론이 등장하고 있지만 모든 얘기는 하나, 곧 공감이라는 단어를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칸트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고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공감적 감성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저자는 쇼펜하우어 쪽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다윈이 적자생존을 얘기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인간이 서로 의지하면서 서로를 아끼는 상호의존적인 존재라고 지적한 사실도 언급된다. 기독교의 전파, 문자의 발달, 민족국가의 등장, 아이를 보는 시각, 양육기법 등을 주제로 역사, 언어학, 교육학, 철학, 경제학 등 다양한 범주를 넘나들면서 공감을 주제로 한 논의가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그뿐 아니다. 저자는 심리학을 통해서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간의 성적 욕구를 강조한 프로이트의 주장을 다양한 예를 통해 공격하고 있다. 인간이 성적 욕구에 의해 움직이면서 파괴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식의 주장은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한마디로 ‘인간’은 프로이트가 얘기하는 식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인류의 역사가 이타적 속성과 함께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끼는 ‘호모 엠파티쿠스’라는 입장에서 보면 프로이트의 주장은 인간의 존재를 너무도 ‘폄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 칸트 프로이트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인간이 이성적이고 이기적 존재라는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는 바람에 우리 속에 내재된 따뜻함 같은 것을 무시한 채 살아왔다는 자기반성과 동시에, 공감을 중시하는 인류의 본 모습에 대한 다양한 자기 성찰이 시도되고 있다.
광고 로드중
공감적 문명이 발전하는 역사는 남을 배려하는 역사였지만 이와 함께 에너지를 함부로 사용해 엔트로피가 증가하면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 받게 만든 역사는 이기적이고 갈등적인 역사였다는 두 갈래 역사관이 제시되면서 저자는 이를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진 복합성에 경이를 표하게 된다. 또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이토록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음도 흥미롭다. 미국의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문화 대신 유럽의 포용적이고 배려적인 문화가 등장하고 있다는 ‘유러피안 드림’의 분위기, 그리고 렌털 리스 혹은 인터넷상에서의 접속을 통해 소유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온다는 ‘소유의 종말’에서 보여준 저자의 시각이 이 책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방대한 자료, 수많은 이론적 역사적 예시들 앞에서 기가 질리기도 하지만 한 장씩 넘기면서 펼쳐지는 다양한 얘기의 맛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공감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저자의 시각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대륙화, 제3차 산업혁명, 분산자본주의, 생물권 정치, 공감 문화에 익숙한 신세대의 출현 등을 통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공감의 문명이 과연 엔트로피 증가라는 괴물과 충돌을 벌일 때 지구촌 붕괴를 피하고 생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이 책의 마지막 문장인데 이는 안타깝게도 의문문이다)라는 의문문에도 ‘공감’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광고 로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