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스타일 비슷
생각해보면 우리 역사에도 비슷한 유형의 리더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반대하는 김종서와 사육신을 척결하고 조카 단종마저 제거한 수양대군의 리더십은 울지 않는 새를 죽여 버리는 스타일이었다. 이에 비해 부왕 태종의 신뢰를 얻기까지 자기를 절제하고 학문을 닦으며 기다리다가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왕위계승권을 물려받은 세종은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는 유형이었다.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기지와 순발력으로 부왕 이성계의 신뢰를 얻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새를 울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광고 로드중
그런데 집권 후반에 들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도요토미가 일본 통일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침략을 감행한 점, 즉 그의 생애 ‘최대의 어리석은 짓(愚行)’으로 평가받는 조선 침략이 그것이다. 태종은 외교를 통해 중국 등 주변국과의 평화를 유지했다. 유연한 사대와 교린정책으로 명나라로부터는 신뢰를, 여진과 일본으로부터는 감복을 얻어냈다. 대마도 토벌을 들어 태종이 해외진출을 꾀했다고 말할지도 모르나 이는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으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낮은 자세로 신민의 목소리 들어
도요토미가 권좌에 오른 후 스스로를 오사카 성에 고립시키며 독재자의 길을 간 데 비해 태종은 몸을 낮추며 신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내가 큰 왕업을 계승하였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실상 마음으로 어렵게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하는 일을 어렵게 여겼던(爲難) 그는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을 만나 고통을 듣고 해결하는 데 열심이었다. 신문고를 설치해 임금의 귀와 눈이 가려지지 않게 한 일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태종은 울지 않는 새를 죽였던 세조와도 달랐다. 단종 복위를 도모했던 성삼문 등 숱한 인재를 직접 국문하고 처형했던 세조와 달리 태종은 고려조에 충절을 바친 정몽주와 길재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창업할 때와 달리 수성의 시기에는 절의를 가진 선비를 존중해 후세 사람의 푯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광고 로드중
새를 울게 만든 태종의 궁극 목적은 재위 말년에 취한 몇몇 조치에서 드러난다. 한 예가 창덕궁의 인정전 개축이다. 그는 나라의 큰 공사는 새 왕이 즉위한 다음 천천히 해도 괜찮다는 신하에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내 자신이 모두 감당하겠다. 세자가 즉위한 다음에는 비록 한 줌의 흙이나 한 조각 나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백성을 수고롭지 않게 하여 깊이 민심을 얻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새로 즉위하는 왕에게 민심을 잃지 않도록 궁궐을 개축하는 일이나 내외척을 제거하는 일 등 이른바 손에 피 묻히는 일을 자기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말이었다. 세종이 그때까지 길러진 많은 인재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온전히 백성 위하는 정치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의 자기희생에 힘입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태종보다 세종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평가받는 점이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보다 은인자중한 가운데 부하의 마음을 얻고 조직을 움직여 가는 지도력으로 마침내 260년의 도쿠가와 바쿠후를 연 도쿠가와가 최후의 승리자로 평가된다. 지금 우리는 새를 노래하게 만드는 리더를 기다린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