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굽는 유공자…3명중 1명 65세 넘어 현금만 주기보다는 ‘생활의 보훈’을
이들에게는 현금 지원을 넘어선 체계적인 복지 서비스가 절실하다. 한국사회서비스연구원이 2009년 10월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상이군경과 가족을 위한 종합복지 프로그램 개발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독립유공자나 6·25 참전용사를 중심으로 한 고령 국가유공자 중 가정봉사원의 도움과 장기요양시설 입소를 희망하는 비율이 각각 42%로 나타났다. 특히 60세 이상 국가유공자 중에는 1∼5급에 해당하는 중상 비율이 75%에 이른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제도를 보면 다른 분야보다 현금 지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주거보장서비스 부문을 살펴보면 보건복지부가 제공하는 노인복지서비스의 경우 노인복지주택, 영구임대주택, 양로시설 및 노인공동생활가정, 주거환경개선사업, 주거급여 등 다양한 제도가 마련돼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주택대부, 즉 현금 지원과 영구임대주택 두 가지뿐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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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아들인 보훈 대상자 차영조 씨(66)는 “고궁 무료 관람이나 버스 승차 등 장애인에게는 많이 제공되는 부분이 보훈 대상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해외의 경우 여러 나라가 자활, 의료 등에 방점을 둔 체계적 보훈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캐나다는 1944년 제대군인부를 창설해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대군인을 대상으로 전시 제대군인수당법, 군인정착법 등 지원법제를 마련했다. 캐나다가 보훈제도 중 중점을 두는 분야가 퇴역군인의 고령화 대책이다. 요양원 등 양로시설 운영보다는 재가자활지원사업(Veterans Independence Program)에 중점을 두고 퇴역자가 집에 머무르며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재가자활지원사업은 잔디 깎기, 눈 치우기, 세탁 청소, 장보기 돕기 등 세심한 배려까지 포함한다.
미국은 2600만 명에 이르는 제대군인을 위해 1989년 제대군인처(The Veterans Administration)를 제대군인부(The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로 승격시켜 위상을 강화했다. 제대군인부의 공무원은 21만여 명으로 정부 부처 중 3번째 규모이며 예산도 국방, 재무, 보건사회 등에 이어 8번째다. 부처가 운영하는 보훈병원은 173개, 의료 및 보건시설이 1000여 개에 이른다.
호주는 유공자들에게 찾아가는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방청 직속 사무소(VAN·Veteran Affairs Network) 30여 곳을 활동 거점으로 삼아 매월 공무원들이 원거리나 오지의 보훈대상자를 찾아가 정부시책을 설명하고 보훈대상자의 자립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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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항일하면 삼대가 망했다는데…국가가 책임지고 지켜줘야죠”▼
‘장군의 손녀’ 김을동 의원, 유공자 후손 범위확대 법안 발의
5일 오전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한나라당 김을동 의원(65·사진)의 눈빛에 힘이 실렸다. 그는 일제에 맞서 청산리대첩을 이끈 김좌진 장군의 손녀로 독립유공자다. 올해는 청산리대첩 90주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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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해외의 유공자 후손에게도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 등에도 유공자가 많아요. 증빙 자료가 부족하고 현지 국적이어서 지원이 어렵지만 모국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생각을 확고히 갖게 해야 합니다.” 그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이린(海林)에 한중우의공원을 세워 항일운동의 뜻을 기리고 10년째 청산리 역사대장정을 열어 동포와 대학생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미국은 우리의 국가보훈처에 해당하는 ‘제대군인부’가 있고 그 수장은 장관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원칙이 살아있어요. 내가 전투에서 사망한다고 해도 국가가 내 자녀를 책임진다고 하면 국가관이 투철해지겠죠.”
최근 역사교육이 미진하다는 지적도 그는 빼놓지 않았다. “심지어 각종 국가시험을 보면 국사 과목이 필수 과목에서 빠져 있습니다. 역사교육의 붕괴는 국가정체성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 현충일, 영국인 가슴엔 양귀비가 핀다▼
전쟁터에 핀 양귀비꽃서 영감…조화로 유공자-가족 기금 마련
정해진 가격 없이 자발적 헌금
지난해 11월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열린 영국 현충일 ‘포피데이’ 행사에서 군인들이 양귀비 모양으로 만든 조화(造花)를 분수대에 뿌리며 전쟁 영웅들을 기리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영국에서 현충일은 11월 11일이다. 1918년 프랑스 콩피에뉴 숲에서 연합국 측과 동맹국 측 간 종전 협정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수많은 영국인은 이날을 ‘포피(Poppy·양귀비)데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제1차 세계대전 격전지였던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지방의 한 벌판에서 유래한다.
영연방 소속 캐나다군 군의관이었던 존 매크레이 소령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무수히 돋아난 붉은 양귀비꽃을 보고 영감을 얻어 ‘플랑드르 벌판에서’라는 시를 썼다. 이 시가 잡지에 게재돼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여기에 감명을 받은 영연방 국민들은 붉은 양귀비 조화를 사서 생긴 기금으로 참전제대군인들을 돕는 전통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영국 캐나다 등 모든 영연방 국가에서는 포피데이를 전 국민의 현충일 행사로 기념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재향군인회가 양귀비 조화 생산 공장을 운영하면서 기금모금 사업을 한다. 11월이 되면 거리마다 양귀비 조화를 판매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자발적 헌금 형식이어서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략 1, 2파운드(약 1800∼3700원)에 가슴에 다는 양귀비꽃을 사며 화환 등의 주문 판매도 한다.
런던 시내 국회의사당 부근에는 현충일 참배를 위한 추모공원도 있다. 포피데이 즈음에는 참배객들이 헌화한 양귀비꽃을 단 나무십자가가 붉은 물결로 장관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해 포피데이 행사에 참석한 한 2차대전 참전 퇴역군인은 영국 BBC TV 행사 중계에서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으로 이루어진 연합국가지만 다함께 국가유공자들을 기리는 전통이 영국과 과거의 영연방까지를 하나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이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