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그러니까 꼭 20년 전 이맘때다. 한 초로의 신사가 신문사를 찾아왔다. 그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 장교였던 김성칠 씨(당시 57세·강원 동해시 송정동 LH아파트 101동 501호). 1952년 1월 10일 교전 중 강원도 양구 김일성고지에서 미8군 7사단에 넘어온 귀순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전쟁 중에 붙들린 ‘포로’가 됐다면서 신분을 되찾게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신분상 귀순용사와 반공포로의 차이가 현격하다. 귀순용사는 ‘국가유공자’지만 반공포로(PW)는 국제법상 ‘전쟁죄수’다. 그런 만큼 진실규명의 의지는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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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삐라가 진실을 밝혀줄 것을 확신하고 그 상황을 또 보도(7월 1일 ‘포로누명 벗길 빛바랜 전단’)했다. 나도, 두 김 씨도 이 삐라가 신분 회복의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했다. 김 씨는 그런 희망을 품고 유엔사무국과 육군, 국방부에 삐라 사본을 첨부해 재검토를 요청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달라진 건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2001년)한 국민의 정부도, 전사자 대우도 받지 못한 제2연평해전의 희생 장병을 끌어안는 현 정부도.
이제 그의 나이 77세. 동해 친척집에 기숙하며 해온 막노동도 더는 할 수 없는 노년이다. 그래도 희망을 접지 않고 열심히 탄원서를 내고 있다. 흔히들 6·25를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 씨에게는 아직도 ‘계속 중인 전쟁’이다.
재판에서는 사진 한 장으로 죄를 벗기도 하고 입증하기도 한다. 그게 왜 이 경우에는 안 되는 것인지…. ‘전쟁유물’인 삐라로 ‘증명’된 귀순을 ‘사실’로 인정 않고, 귀순용사를 전쟁죄수로 전락시킨다면, 글쎄. 전쟁기념관의 6·25 유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60주년을 맞은 6·25에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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