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고성방가 피해 숨어든 골목
‘더 작은 목소리로/더 낮은 목소리로, 안 들려/…/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라일락 같은 소리로/모래 같은 소리로/…/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너의 목소린 너무 크고 크다’(장석남의 ‘낮은 목소리’)
아수라장에서 조금만 벗어나니 금세 한갓지다.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30∼4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골목길 풍경이 펼쳐진다. 골목은 거기 그대로 있었는데 내가 어디서 헤매다 돌아온 것이겠지. 막다른 길인가 싶더니 용케도 어디론가 이어진다. 마치 모세혈관 같다. 골목은 그냥 통로가 아니라 이웃이 함께 숨쉬고 살았던 생활의 터전이다. 말하자면 생태계다.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낸 이탈리아 소설가 제수알도 부팔리노는 현대화의 분칠로 상실한 고향의 옛 초상을 복원하려고 사라진 직업, 언어, 장소를 기억의 곳간에서 불러내는 작업을 한다. 이를 꼼꼼히 기록한 ‘그림자 박물관’에서 그는 탄식한다. “자연, 수공예품, 언어와 관습에 대한 다양한 학살에 대항하고자 한다. 그 학살은 눈앞에서 쉼 없이 일어나며 우리를 야만화한다. 그리고 모든 제도를 관습이 되기도 전에 파괴해 버린다.”
호주의 부부 저널리스트가 모로코의 옛 수도에 집을 사서 제2의 인생을 꿈꾼 것도 중세 도시의 정서가 살아있는 골목의 신비로움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쓴 ‘페스의 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페스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고대의 성벽도시는 모로코의 문화와 정신의 핵심을 이루며 기쁨과 의욕을 동시에 안겨준다. 끝도 없이 이어진 골목길은 박물관이 아니라 삶의 공동체이다.”
체취 밴 이 길만은 남겨두기를
인간의 풍경이 삭막해질수록 시대의 애환과 그를 거쳐 간 사람의 기억과 사연이 켜켜이 쌓인 골목길의 푸근한 ‘인성’이 그리워진다. 평생 골목길만 찍은 사진가 김기찬의 사진집을 넘겨본다. 물 채운 양동이에 들어앉아 물놀이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 보자기를 둘러씌우고 손자 머리를 깎아주는 할아버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이준관의 ‘구부러진 길’)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